<17.02.04>

1. 오, 뽀얀 뚱보 여인이여 / 윌리엄 트레버 / 윌리엄트레버 세계문학 단편선(현대문학사) / 청류

군더더기 없이 삶을 요약해 보여주는 것은 단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이 단편은 그런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절묘한 시점 변화와 반전의 삽입 또한 눈여겨볼 만 하다.

 

2. 니글의 이파리 / J.R 톨킨 / 2007년 잡지 판타스틱 vol.3(7월호) / 훅

영화 반지의 제왕이 재개봉했기에 겸사겸사 원작자의 단편을 추천, 창작자 입장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친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고, 추천인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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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최근에 아카시 세이주로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학교 열람실에 있었다. 열람실에 가기 위해서는 다섯층이나 계단을 올라와야 했기 때문에 가까운 교실을 두고 굳이 거기까지 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은 드물었다. 졸업을 앞둔 2월 말이었다. 열람실은 교실 세 개를 합친 크기로 넓고, 천장이 유난히 추웠다. 약간의 아늑한 분위기를 더해주던 커튼마저도 연말 대청소 때 관리실에서 모두 떼어버렸다. 창 밖에는 마치 조명탄을 터트린 것처럼 형체 없는 태양이 싸늘하고 창백한 빛으로 모래가 언 운동장, 마른 나뭇가지, 차가운 은색 창문을 지나 열람실 안을 밝히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짐을 챙기고 있었다. 다음 주면 열람실이 폐쇄될 예정이었다. 그는 새로 진학하는 고등학교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집에서 공부를 할 작정이었다. 지난 삼 년간 테이코에서 경험한 일들이 벌써부터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미친 사람처럼 농구공을 던져대던 일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를 지르던 일, 하이파이브, 대화, 권태와 신경전 같은 것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농구를 계속하기로 했지만 그게 과거를 즐겁게 만들 수는 없었다. 

 버릴 책을 골라내는 동안 누군가 등 뒤로 다가왔다.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미도리마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신타로.”

 그는 아카시를 마주보았다. 시든 초록색 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의 얼굴이 몹시 낯설고 또 친숙했다. 만나지 못한 몇 개월 사이 아카시는 머리를 짧게 잘랐다. 미도리마는 순간적으로 그가 몇 달 전에 비해 더 어른스러운 얼굴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직 어렸다. 아카시가 대뜸 말했다. 

 “최근에 이런 쪽지 받은 적 없어?”

 그가 작은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아카시의 이름과 원색적인 비난이 적혀 있었다. 미도리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받은 적 없어.”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카시 세이주로는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당해 이상해졌다. 교사들도 그가 이상한 것을 알지만 쉬쉬할 뿐이다. 그가 이끄는 농구부가 다른 학교 학생을 모욕해 자살까지 몰고 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었다. 미도리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시가 그런 소문에 주의를 기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지난 1월 농구부 고문 선생이 미도리마를 교무실로 불렀다. 그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아카시의 농구부 운영 방식이 적절했다고 생각하나?’, ‘그가 부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아카시가 감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나?’

 하나같이 우스운 질문이었다. 

 미도리마는 대답했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직접 물어보세요. 저희는 몇 달 뒤면 졸업할 텐데 이런 질문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부모님께서도 걱정하시고…… 네가 그와 제일 가까운 사이니까 물어보는 거란다.’

 미도리마는 대답했다.  

 ‘아카시가 저와 특별히 가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팀원들에게 물어도 비슷할 겁니다.’

 미도리마는 그 후 오랫동안 선생에게 ‘당신은 일 년 내내 아카시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넘겨놓고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런 후회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카시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카시는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리가 안 좋네. 추웠겠는데.”

 다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어차피 이제 마지막이니까.”

 미도리마는 챙겨갈 것은 가방에 넣고 버릴 책은 가슴에 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까?”

 아카시가 말했다. 그들은 함께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세계가 멸망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3층까지 내려왔을 때 미도리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답지 않게 그런 걸 신경을 쓰다니.”

 아카시는 웃었다. 

 “그러게.”

 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알아.”

 그들은 2층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계단 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카시와 이렇게 걷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지막 부활동 이후로 그들은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바빴고, 몇몇 친구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알았어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각자 가야 할 길을 갈 뿐이었다. 문득 아카시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그 쪽지를 화제로 꺼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나친 생각 같았다. 아카시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많은 진지한 얘기를 나누었고, 서로의 자존심을 존중했다. 절대로 감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은 없었다. 그런 것은 미성숙한 일로 여겨졌다. 그들은 좋은 팀원이었고, 훌륭한 주장과 부주장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다정한 친구는 될 수 없었다. 

 아카시가 말했다. 

 “나중에 슈토쿠 농구부는 어떤지 얘기해줘.”

 “생각해보지.”

 아카시가 미도리마보다 몇 걸음 먼저 1층 현관에 도착했다. 그는 유리문의 손잡이를 잡고 미도리마가 마지막 몇 계단을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이즈음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 우리가 정말 어린아이라면, 이렇게 쉽게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해야만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하고, 별 일 아닌 척 서로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있다면, 차라리 네가 알기 쉬운 잘못을 저지르고, 내가 내심 풀이 죽은 너의 등을 두드리며 새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는 계단을 마저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아카시의 얼굴이 너무 앳되어 그는 마음이 아팠다. 아카시의 등 뒤로 운동장이 하얗게 빛났다. 아카시가 의아한 듯 말했다. 

 “뭐해? 이제 가야지?”

 “그래.”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는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잠에서 깨어 있었고,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지난 밤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미도리마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었다.  



단편소설 읽기 모임

2016. 9. 27. 09:50

 ※ 제목 / 작가 / 수록서적(출판사) / 추천인

 

<16.09.03>

1. 차가운 방정식 / 탐 갓윈 / SF명예의 전당1(오멜라스) / 청류

과학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조망하여 SF란 무엇인가를 간명하게 드러내보인 작품. 현재는 SF계의 고전 걸작으로 꼽히나 당대에 일으켰을 센세이션을 예측해볼만 하다

 

2. 내일은 너무 멀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숨통(민음사) / 김미영

단편소설의 매력을 최대한 발휘. 응집력 있고 과감. 강렬한 지역적 색채와 여성주의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16.09.25>

3. 어떤 여인들 / 앨리스 먼로 / 직업의 광채(홍시) / 미카

단편소설이지만 장편소설을 읽은 듯 캐릭터가 잘 살아있고 인생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며 여성주의적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해서 추천.

 

4. 지도 중독 / 은희경 /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창비) / 다원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니컬한 시선이 '지도'와 '곰'이라는 다소 비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재치있게 드러났다. 다양한 인용, 세련된 묘사 등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이 뛰어나다.

 

5. 가든 파티 / 캐서린 맨스필드 / 가든 파티(펭귄클래식) / 소솜

고전이지만 보편적인 이야기의 호소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 짧지만 인상적이다. 삶의 모순성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서사구조가 돋보인다.

 

<16.11.06>

6. 건(乾) / 김승옥 / 무진기행(민음사) / 다원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한 소년의 타락과 비뚤어진 성장을 신랄하게 드러냈다.  현학적 문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치밀한 묘사가 탁월하다.

 

7. 금연주식회사 / 스티븐킹 / 스티븐킹 단편집5(황금가지) / 청류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대표 단편 중 하나로, 장르의 특징과 대중문학의 장점을 최대로 끌어내어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

 

8. 나의 콘트라밴드 / 루이자 메이 올콧 / 초월주의의 야생귀리(문학동네) / 미카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품은 작은 아씨들만이 아니야!

 

<16.12.03>

9. 빈 찻잔 놓기 / 권여선 / 내 정원의 붉은 열매(문학동네) / 소솜

사소하고 개인적인 서사도 흥미진진한 소설로 구조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주는 작품

 

10.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 조안나 러스 / 혁명하는 여자들(아작) / 훜

70년대에 등장한 글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진보적인 설정의 소설. 일부 캐릭터들의 묘사는 지나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1. 물건들 / 어슐러 K. 르귄 / 바람의 열두방향(GRYPHONBOOKS) / 김미영 

환상적이면서도 단단한 문장들로 구성된 짧은 단편. 희망과 용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의 코멘트대로, '세상에는 심연이, 갈라진 틈이, 맨 마지막으로 걸어야 할 걸음이 존재한다.'

 

 



 네번째 모임을 끝으로 단편소설 읽기 모임 1시즌이 끝났습니다. 충동적으로 기획한 모임이었지만 좋은 멤버들을 만나서 같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1시즌은 12편 중 여성 작가의 작품이 9편이었고, 전체적으로 '페미니즘', '여성'과 같은 화두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영미문학을 많이 읽었지만 고전, SF,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단편소설 읽기 모임을 통해, 멤버 분들 모두 최소 한 번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읽지 못했던 소설을 읽거나, 아예 존재를 몰랐던 작가를 추천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훜님이 추천해주신 단편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 연상되는 일러스트를 함께 감상한 일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소설에 대한 생각을 직접 말로 표현하고, 남의 감상을 듣고, 공감하고, 때로는 논쟁하는 시간이 우리의 내면에 '이야기의 힘'을 더해주었길 바랍니다. 

 2시즌은 한두 달의 휴식기 이후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럼 2017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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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황녹] 하루 




 미도리마가 정말로 연애경험이 없는 숙맥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심심치 않게 고백을 받았고,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연애를 시작해 삼 년 동안 총 세 번의 연애를 했다. 키세에 비해 교제 상대의 숫자가 적은 건 사실이긴 했지만 질적으로 더 성숙한 교제를 했다. 사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연애 경험이 아니라 아쉬워 본 경험이었다.

 세 번의 연애 중 미도리마가 먼저 고백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그녀들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너는 나한테 관심이 없잖아'라거나, '우린 너무 다른 것 같아'라며 그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때마다 미도리마는 다소 충격을 받지만, 실연의 상처를 오래 되새기지는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애인과 헤어질 때는 키세가 옆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미도리맛치는 본인이 왜 차이는 지 알아요?"

 "알아."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키세는 미도리마가 다른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는 더 타인에게 마음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미도리마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둘 중에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은 늘 키세였다. 밤 늦게 전화를 하는 것도 키세, 되도 않는 핑계를 들어 미도리마를 불러내는 것도 키세였으며 궁금한 것이 많은 것도 키세였다. 요즘 학교에서는 어떤 공부 해요? 졸리지는 않아요? 그 책은 뭐예요? 내일 점심은 누구랑 먹어요? 미도리맛치는 방 혼자 쓰죠? 창문에 커튼은 있어요? 무슨 색인데요? 내 손 차갑지 않아요?

 미도리마는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꾸는 빼먹는 일은 없었다. 키세는 그런 애매한 태도에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 굳이 미도리마의 반응을 하나하나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 일찍 보낸 안부 인사에 미도리마가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에 엉뚱한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는 것이 좋았고, 타박을 하면서도 차가운 손을 뿌리치지 않는 옆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키세라 해도 여자를 소개받겠냐는 문자는 재미로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수업이 없는 평일 오후였다. 키세는 제 방 침대 위에 누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도리마가 문자를 잘못 보낸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폭소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

 -나요?

 -그래.

 처음에 키세는 당황했다. 그는 거듭 미도리마의 문자를 읽어보았다. 문자의 내용을 이해한 뒤에는 슬프기보다 자존심이 상했고, 그래서 곧장 짜증이 났다.

 -좋아요.

 문자를 보내놓고 잠시 미도리마가 전화를 걸어 '장난이었어.'라고 말하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별로 가망은 없는 것 같았다. 십여 분이 지난 후에 미도리마는 답장으로 낯선 여자의 이름과 사진, 전화번호를 보냈다. 키세는 답했다.

 -고마워요! 잘 되면 한 턱 쏠게요!

 삼십 분 정도 더 기다렸지만 미도리마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잠잠한 휴대폰을 침대 발치로 던져놓고 키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문했다.

 그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나?

 그의 직감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미도리마의 반응이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 번은 키세가 그에게 미니 라디오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미도리마가 지나가는 말로 방에 라디오가 없다고 한 것이 생각났던 것뿐이었다.

 "공부하다가 적적할 때 들으라고요."

 파스텔 톤의 라디오는 전자기기라기보다는 장난감에 가까워 보였다. 키세는 미도리마가 진짜로 공부를 하다가 라디오를 듣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끔 쳐다볼 수는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미도리마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작은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고맙다는 것이야."

 키세는 그가 쑥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라디오가 어떻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키세도 금세 그 라디오를 잊어버렸다.

 하지만 몇 주 후에 뜻하지 않게 그 라디오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커피숍에 있었다. 키세가 먼저 자리에 앉았고 미도리마가 그에게 무엇을 마실 건지 물었다. 키세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고 했다.

 "너무 졸려서요."

 미도리마는 의자 위에 내려놓은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 때 키세는 우연히 가방의 열린 틈을 보았고, 자신이 선물한 라디오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 미도리마가 음료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처음에 키세는 모른 척 물었다.

 "미도리맛치, 이거 학교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가방이죠? 전부터 계속 이거 들고 오던데."

 미도리마는 빨대로 아이스 초콜릿을 마시고 있었다.

 "딱히 바꿀 이유도 없잖아."

 ", 그래요?"

 키세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미도리마의 입장이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의 생각에 선물은 주고 나면 그걸로 끝이고, 그 후의 처우는 전적으로 받는 사람의 몫이었다.

 두 사람은 테라스에 내놓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차양 위로 비스듬한 각도로 햇빛이 비쳐 가는 줄무늬를 그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미도리마는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길가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종일관 따뜻한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를 흩트려놓았다. 키세는 라디오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망치고 싶기도 했고, 미도리마가 느긋한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기도 했다. 그가 갈등하는 사이에 미도리마가 저녁에 함께 보기로 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키세는 그 화제에 집중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내가 준 목걸이는 왜 안 해?'와 비슷한 질문을 던져왔는지 몰랐다. 그럴 때마다 키세는 진력을 냈다. 하지만 과거 자신이 받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거나 남에게 줘버렸던 선물의 주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의미 없는 존재였는지 까지 생각하자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졌다. 결국 상대의 기분을 자신과 비슷하게 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그의 자제심을 압도했다. 그는 불쑥 말했다.

 "미도리맛치,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

 미도리마는 키세가 영화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빨대에서 입을 떼고 키세를 바라보았다. 키세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소심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선물 받은 게 마음에 안 드는 경우 말이에요. 가끔 버릴 때도 많았어요. 그렇다고 아예 뜯어보지도 않은 적은 없었는데. 미도리맛치가 저보다 한 수 위네요."

 예상과 달리 미도리마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빨대가 꽂힌 뚜껑을 열어 플라스틱 컵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키세는 그것이 긴장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너무 과장된 해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내가 라디오를 들을 만큼 한가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키세는 날카롭게 웃었다. 

 "가방에서 라디오를 꺼내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긴 하죠, ...... 15?"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을 알고 있었잖아. 여유가 될 때 꺼내려고 했어."

 "그냥 솔직하게 선물이 맘에 안 들었다고 하면 어때요?"

 "내 취향을 신경 쓴 선물인 줄은 또 몰랐군."

 그 뒤로 소모적인 신경전이 몇 분 더 이어졌다. 하지만 어쨌든 키세는 웃는 표정을 유지했고 미도리마도 치명적인 한 마디는-'네가 무슨 상관인데? 애초에 이런 걸 왜 준거야?'와 같은 류의- 끝내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예정대로 영화를 보았다. 키세는 미도리마의 손가락을 건드리지도,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영화관을 나설 쯤엔 둘 중에 아무도 종전의 말다툼을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동네에 살았으므로 중간 지점에서 택시를 세우고는 근처의 공원을 걸었다. 헤어지기 직전에 미도리마가 느닷없이 말했다.

 "집 앞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어."

 키세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단팥죽도 판다고 써 있더군."

 키세는 우습다는 듯 물었다.

 "아직도 단팥죽 좋아해요?"

 미도리마는 왼쪽 팔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오른팔로 옮겨 들며 말했다.

 "만약 네가 가 볼 생각이 있다면......"

 키세는 그의 말을 끊고 팔을 툭 건드렸다. 

 "들어가요. 연락할게요."

 미도리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자기 전에 문자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키세는 아마 미도리마가 라디오를 듣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그들의 관계가 진전되었다는 신호가 아닐 수 있을까? 키세가 그렇게 완벽한 오해를 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라디오 선물로 말다툼을 하고 몇 주 후에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오토바이 키에 달 가죽 끈을 선물했다. 그것을 건넬 때 미도리마의 표정을 기억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관심한 듯 싸늘한 표정이었다. 당시에는 그 표정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키세는 그가 그에게 줄 뭔가를 준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게다가 그는 미도리마의 차가운 표정을 퍽 좋아했다. 그는 그 표정이 그의 얼굴색과 잘 어울리고, 가끔 짓는 웃음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새삼스레 그런 사소한 표정과 동작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표정이 그들이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힌트였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단지 몇 번 카페에 가고, 자주 연락을 하고, 함께 영화를 몇 편 보았을 뿐 무슨 꽃이나 반지를 주고 받은 사이도 아니었다. 키세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들은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의 일이었다고 얼버무려질 수도 있는 것뿐이었다.

 키세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여전히 휴대폰은 조용했다. 평일 오후의 방안을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도 은은하게 밝았다. 그는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머, 어떻게 해! 진짠가 봐~!"

 옆에 선 여 후배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미도리마는 일차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고, 키세의 답장에 짜증이 났으며, 마지막으로 그런 문자를 보낸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에는 아직도 음식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무르고 싶지가 않았다. 후배가 서둘러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기를 반납하는 동안 그녀는 내내 그의 옆에 붙어서 소개를 해줘서 고맙다느니, 고등학생 때부터 키세의 팬이었다느니 하는 말을 쫑알거렸다. 미도리마는 적당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완전히 들뜬 후배가 자꾸만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키세에 대해 질문 공세를 퍼붓는 바람에 결국 점심시간 내내 후배와, 후배가 떠올리게 하는 키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후는 내내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준비한 발표는 컴퓨터 오류로 절반 이상이 빈 네모로 변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발표를 마치고 마지막 시간에는 이번 학기 들어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졸았다. 비몽사몽간에 키세에게서 문자가 오는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문자는 키세의 목소리로 읽혔다. 미도리맛치, 소개해준 아유밋치랑 저 사귀기로 했어요. 언제 한 번 셋이 밥 먹어요. 꿈 속의 미도리마는 몇 번이나 답장을 썼다 지우다가 잠에서 깼다.

 저녁에는 타카오와의 약속이 있었다. 그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스스럼없이 등을 두드렸다.

 "완전히 죽을 상이네. 가자, 괜찮은 가게를 봐뒀어."

 타카오가 그를 안내한 가게는 뜨거운 어묵과 두부를 파는 술집이었다. 작은 테이블마다 낮은 파티션이 놓여있어 무척 아늑했다. 메뉴를 뒤적거리는 타카오를 보면서 미도리마는 내내 곤두서있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최근에는 쉬는 날에 타카오를 만난 일이 거의 없었다. 대개는 키세와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키세와 타카오는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았다. 둘 모두 미도리마에게 호의적이었고, 대체로 유쾌했다. 그러나 타카오와 달리 키세와 보내는 시간은 근본적으로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이 말을 키세가 들었다면 물었겠지. '그래서, 싫어요?'

 따뜻한 술을 마시면서 미도리마는 오늘 키세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줬다는 얘기를 했다. 그에게는 전에도 키세와의 일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타카오는 미도리마가 하는 모든 얘기를 즐거워하며 듣고는 이번에는 맥주를 두 잔 시켰다. 금세 잔이 나왔다. 첫 모금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타카오가 말했다.

 "키세 료타라, 인기가 많을 타입이긴 하지. 신쨩이 빠질 줄은 몰랐지만."

 미도리마는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던 짠 과자를 자꾸만 집어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카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미도리마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가?"

 "내가 '신쨩이 빠졌다'라고 했잖아. 네가 부정할 줄 알았어."

 그는 미도리마가 안경을 올리는 동작을 흉내 냈다.

 "'빠지긴 누가 빠졌다는 거야.' 이렇게."

 "대꾸할 가치도 없군."

 미도리마는 맥주를 조금 더 마셨다. 타카오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전에 듣기로는 둘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미도리마는 짧게 대답했다. 

 "글쎄."

 "? 라디오 사건도 잘 마무리되었던 것 아냐?"

 미도리마는 당황하여, 그리고 조금은 화가 나 타카오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을 떠올렸다.

 '선물을 가방에서 빼는 걸 잊어버렸어. 그렇다고 내가 그걸 내다 버린 건 아니잖아?'

 그날 타카오는 배꼽을 잡고 웃었었다. ‘정말 너네 둘이 그런 걸로 싸웠다고? 맙소사.’

 미도리마가 대답했다.

 "그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어."

 "그럴 리가."

 미도리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타카오가 익히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함께 부 활동을 하던 시절, 하루 세 번 허락된 억지를 부리기 직전이면 늘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미도리마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미도리마는 맥주 한 잔을 다 비운 후에 말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어. 키세는 원래 그렇다고."

 "뭐가 그렇다는 거야?"

 "중학생 때도 툭하면 숙제를 도와달라고 했었어."

 "?"

 "같이 하교 하는 길에 잠깐 공원 벤치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봐주곤 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단 얘기야."

 타카오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건 전혀 다른 얘기잖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아."

 "걔는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글쎄."

 타카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카오가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그가 새 술과 안주를 주문하는 소리를 들으며 미도리마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에게서 수학 문제 풀이를 듣던 키세를 떠올렸다. 키세는 자주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미간을 찌푸리고는 미도리마가 풀이를 적는 노트를 노려보았다. 가끔은 그가 너무 가까이에 붙어 앉아 글씨를 쓰기 불편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키세의 속눈썹이 깜빡이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키세가 어떤 아이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가 보기에 그는 결코 정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많은 여학생들이 그와의 특별한 관계를 꿈꿨다.

 확실히 키세는 별 의미 없이도 남의 눈을 보며 잘 웃었다. 자주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고, 말을 하면서 남의 손이며 팔을 건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쉽게 남의 말을 무시했고 제 관심 밖의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큼 성의가 없었다. 그에게는 -미도리마와의 다른 의미로- 너무 많은 습관적인 동작과 말들이 있었다.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가 하는 양을 한 시간이라도 관찰한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키세는 주변에 작은 선물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것은 자주 남에게서 처치 곤란인 작은 선물을 받기 때문이지 특별히 그가 다정다감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여자애들이 주는 편지를 다 읽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딱히 그 여자애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를 좋아한다면, 그 정도는 알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학생 시절 키세와 미도리마는 자주 하굣길을 함께 했다. 키세는 거의 이 주에 한 번 꼴로 고백을 받았다. 사람이 드문 공원이나 체육관 뒤에서 그를 불러 세우는 여자애들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키세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부탁하곤 했다.

 "미도리맛치, 미안해요.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미도리마는 그냥 키세를 두고 가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성격에 맞았다. 실제로 그런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진짜 먼저 가버렸어요? 내가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아요?' 운운하는 긴 문자나 전화 통화를 받아야 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키세는 원래 호들갑을 떠는 습관이 있었다. 키세가 그를 찾는 것은 고백을 받는 동안 기다리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상황을 정리하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진짜 이유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단지 키세의 칭얼거림을 듣고 싶지 않았고, 그가 고백을 거절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 날도 비슷했다. 그들은 학교 담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부활동이 끝난 시간이었기에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키세는 점심 시간에 아오미네와 함께 했던 장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들이 한 일-핸드볼로 농구하기-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골을 포기하고 온 강당을 뛰면서 서로의 몸을 맞춰댔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웃고 있던 키세는 미도리마의 웃음소리에 휩쓸려 잔파도를 타듯이 거듭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 햇빛을 아래 키세의 얼굴은 평소보다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담장 모퉁이를 막 지날 때, 여자아이 하나가 튀어나와 키세의 앞을 가로막았다. 키세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했고 손을 조금 떨고 있었다. 그들은 한 눈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키세는 흥이 식은 얼굴로 미도리마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줘요.'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키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섰다. 보통 그러한 이벤트는 5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보다 대화가 길었다. 오렌지색 저녁 공기가 서서히 푸른빛을 띄어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깨알 같은 글씨를 보는 것이 어려워질 쯤 미도리마는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를 접어 가방 속에 넣었다. 

 그는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키세 쪽을 쳐다보았다. 여자 아이가 키세의 팔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키세는 미도리마를 등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살짝 어깨를 수그렸다. 미도리마는 그들이 키스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키세의 오른팔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여자아이의 손을 떼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누구의 것이랄 것 없이 언성이 높아졌고,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키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미도리마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자아이는 키세를 밀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갔다. 미도리마는 잠시 그대로 키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이름을 부를까 데리러 걸어갈까 고민하는 사이, 키세가 먼저 몸을 돌려 미도리마를 향해 걸어왔다.

 "오래 기다렸죠?"

 생각보다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미도리마는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 뻔하죠."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어조였다.  

 "자기가 멋대로 오해해놓고는......"

 키세는 모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금 창피한 듯도 했고 얼이 빠진 듯도 했지만 미도리마는 그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도리마 역시 사람들의 오해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를 좋아한다면서 접근하지는 않았다. 그는 키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서 봐."

 키세는 순순히 제자리에 섰다. 미도리마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른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섬세한 윤곽선을 그렸다. 키세의 뺨은 조금 붉어져있을 뿐 상처는 없었다.

 미도리마가 말했다.

 "집에 가서 냉찜질을 하는 게 좋겠어."

 "그래요?"

 "부을지도 모르니까."

 "설마요."

 키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무성의한 목소리에 이끌려 미도리마는 눈을 들었다. 키세는 어린애 같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있죠, 잊을 만 하면 이런 일이 있는데. 이해가 안 돼요. 나한테 무슨 기대를 한 걸까요? 모르는 사이인데."

 말을 마치고 키세는 약간 고개를 숙여 미도리마의 눈을 피했다. 그의 정수리에서 시선을 돌리며 미도리마는 말했다.

 "네 잘못도 있다는 거야."

 "미도리맛치도 그 소리 하기예요?"

 키세가 투덜거렸다. 큰 마음을 먹었는데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짧게 내뱉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굴값을 하는 거지."

 "?"

 키세는 잠시 멍하니 미도리마를 쳐다보았다. 미도리마는 계속 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 등 뒤에서 키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금세 미도리마를 따라잡았다.

 "제 얼굴이 어떤데요? ?"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세는 개의치 않고 다른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도리마는 가급적 키세 쪽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을 보고 걸었다. 다시 키세의 얼굴을 돌아보면 아까의 그 눈동자가 생각날 것 같았고, 그러면 여자애들이 왜 그렇게 쉽게 키세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희망을 갖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키세의 생각에, 굳이 따지자면 모든 일은 미도리마의 자가용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탄토는 미도리마의 체구에 비해 너무 작은데다가 낡기까지 했다. 그는 조만간 새 차를 살 생각이었지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새 차를 사면 탄토를 물려받기로 되어있던 여동생은 시시때때로 언제 새 차를 살 거냐고 재촉하다 급기야는 전화를 걸어 '이 꼰대야! 내가 땅 파서 차를 구하는 게 빠르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미도리마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키세는 이 대목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어쨌든, 미도리마는 여동생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적절한 가격대, 브랜드, 차종부터 구매 장소, 수단까지 모든 조건을 최상으로 조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4월 둘째 주 수요일 아침, 늙고 지친 탄도는 주행거리 20만 킬로미터를 찍기 전에 완전히 멈춰서고 말았다. 인근의 모든 직장인들이 출퇴근길에 반드시 지나는 타케노리 사거리 한가운데에 멈춰선 자동차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도리마는 9시에 중요한 실습시험이 있었다. 전화만 주면 5분 이내로 달려온다던 보험회사 직원들은 2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클랙슨을 울려대는 자동차 행렬 한 가운데 서서 연신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키세가 얼마 전에 오토바이를 샀다던 얘기를 떠올렸다.

 키세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행히 등교하기 전이었고, 달리 바쁜 아침 일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그가 십 분만에 미도리마의 앞에 나타난 이유는 아니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키세는 이렇게 말했다.

 "미도리맛치한테서 이런 연락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미도리마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게 바로 그가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였다.

 키세의 말대로 그 둘은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키세는 가끔 미도리마에게 문자를 하곤 했었다. 집이 가까운 만큼 동네 마트나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런 곤경에 처했을 때 서로를 떠올릴 만큼 신뢰가 두터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럴 경우 키세는 대학 친구들이나 에이전시의 직원을 부를 터였다. 그는 미도리마가 누구를 부를지는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여하튼 그게 자신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미도리마의 정황 설명이 부족하고, 갑작스러운 호출은 키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몇 십 분 후, 키세는 거의 주차장이 되어버린 도로를 이리저리 뚫고 미도리마의 차 옆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가 도착했을 쯤에는 보험회사 직원과 경찰 몇 명이 도착해서 견인차를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며 키세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게 미도리맛치 차예요? 세상에... 혹시 나중에 박물관에 기증할건가요?"

 미도리마는 대꾸를 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헬멧은 하나 더 있어?"

 ", 난 안 쓰니까요."

 미도리마는 키세 뒤에 올라탔다.

 "그러다 제 명에 못 살 거야."

 키세는 웃었다.

 "그럼 제가 쓸까요?"

 미도리마는 혀를 차며 헬멧을 썼다.

 키세는 정확히 9 2분 전에 미도리마를 병원 정문에 데려다 놓았다. 병원에 뛰어들어가기 전 그는 키세에게 점심 때 다시 병원에 올 수 있겠냐고 했다. 역시 달리 할 일이 없었던 키세는 이번에도 순순히 그렇게 했다. 점심 시간의 병원 식당가는 좁고 사람들로 붐볐다. 두 사람은 원했던 식당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미도리마는 도시락을 사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걸 깜박했어."

 "매일 여기서 먹는 거 아니에요?"

 알록달록한 인테리어의 도시락 체인점은 의자가 무척 낮아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우겨 넣어야 했다. 미도리마는 젓가락으로 형태가 다 무너진 무 조림을 헤집으며 말했다.

 "보통은 아니야."

 "어디서 먹는데요?"

 "구내식당."

 미도리마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는 아버지의 자가용이 멈춰서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화가 난 여동생의 꼰대 운운하는 외침까지 빼먹지 않고 설명했는데 마치 그것이 도움을 준 상대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주변에는 미도리마처럼 가운을 입었거나, 아니면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병문안을 온 듯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키세는 의대생들의 생활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몰랐는데, 여기 우리 학교랑 꽤 가깝더라고요. 가끔 놀러와서 점심 같이 먹어도 돼요?"

 키세가 돈까스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놀러온다고?" 미도리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병원에?"

 키세는 '그냥, 신기하잖아요. 병원.'이라고 말하려다가 습관적으로 더 부드러운 방법을 택했다.

 "미도리맛치 보러요."

 그러자 미도리마는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운 웃음이라기보다는 가당찮은 소리를 한다는 식이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지. 온다면 말이지만."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처음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말에 왜 그렇게 오기가 생겼던 것인지 시간이 지나고도 키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미도리마가 어떤 타입인 줄 알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조용하고 내면에 몰두하는 타입이라고 말할 것이다. 키세의 생각은 달랐다. 미도리마는 경쟁적이고 도전적이었다. 그는 승리하는 것, 즉 남을 압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키세가 당시 동경하던 아오미네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또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상대팀을 찍어누르기 위한 의도가 명백한 슛을 쏘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채 확인하지 않고 뒤돌아 서곤 했는데, 그런 오만한 태도에서 풍기는 강렬하고 호전적인 기세는 특유의 냉정한 태도로도 완전히 감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명석했고 자제를 알았다. 아오미네와 달리, 그는 자신의 충동이 생활의 근본적인 부분을 흔들지 않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균형을 잡기 위한 그런 노력은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그는 미처 자기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키세는 그런 종류의 '한 발 뒤로 빼는' 현명함을 그다지 높게 평가한 적이 없었다.

 키세가 의식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냥 직관적으로 미도리마의 성향을 이해했다. 키세와 미도리마는 충분히 친해질 기회가 많이 있었다. 중학교 2년간 그들은 함께 부 활동을 했다. 일주일에 나흘 이상 코트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시간을 보내면서도 보통 기대되는 친밀한 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함께 하교를 했다. 그러나 가끔 키세가 말이 없는 날이면 헤어질 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을 때도 있었다. 키세가 느끼기에 미도리마는 그와 가까워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키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가끔은 이상한 반발심이 들 때가 있었다.

 하굣길에서 고백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고백을 받는 장면을 본 남자아이들은 보통 여자아이의 발소리가 채 멀어지기도 전에 질문 공세를 퍼붓거나 야유를 쏟아 붓기 마련이었다. 미도리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의 고백을 거절하고 돌아서면 먼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주로 무슨 노트를 살펴보거나 -당최 무슨 노트가 그렇게 많은지 키세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냥 똑바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키세가 가까이 다가가면 짧게 "끝났어?"라고 묻고는 그만이었다. 그는 키세의 부탁에 따라 열심히 인수분해며 가정법을 가르쳐 놓고는 시험을 어떻게 보았냐는 말은 일언반구도 않았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냉담한 태도로 눈인사만 보내고 사라졌다.

 간단히 말해서 자주 재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관심을 끌었다.

 '온다면 말이지만.' 냉소적인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란 듯이 그의 말을 뒤집고 싶었다. 키세가 그날 오후에 바로 미도리마의 병원을 찾은 것은 그런 가벼운 반발심 때문이었다. 미도리마는 문자를 받고 정문으로 나왔다. 점심 때보다 안색이 한결 더 나빠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카센터 갈 거죠? 데려다 줄게요."

 미도리마는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키세는 웃으며 덧붙였다.

 "애프터 서비스라고 쳐요."

 키세는 머리가 망가지는 것이 싫었으므로 이번에도 헬멧은 미도리마의 차지였다. 그가 알려준 카센터로 향하는 사이에 키세는 길을 잃었다. 미도리마는 조바심을 내거나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왼손으로는 키세의 옆구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좌석 옆에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그가 길을 찾기를 기다렸다. 사실 키세는 오토바이 뒤에 누군가를 태워본 적이 없었다. 방향을 틀 때마다 미도리마의 무게 때문에 오토바이가 평소보다 더 많이 기울어져서 주의가 필요했다. 가끔씩 미도리마가 잡고 있는 등허리가 의식되기도 했다. 미도리마는 아주 조용했으므로 그것 외에는 그가 뒤에 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키세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신경이 쓰였다. 

 카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결과적으로 택시를 타는 게 나았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미도리마는 어렵지 않게 뒷좌석에서 내려 키세 앞에 섰다. 그가 말했다. 

 "너 예전에는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가 해석하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어, 키세는 일부러 경쾌하게 대꾸했다.  

 "무슨 소립니까, 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상냥하거든요."

 키세는 미도리마가 뭐라고 타박을 주거나, 그의 말을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점심 때와 마찬가지로 가당치 않다는 듯이. 그러나 그는 물끄러미 키세를 쳐다보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키세는 순간 그가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뺨은 평소보다 혈색이 돌고 있었지만 그저 바람을 맞은 탓인 것도 같았다. 키세가 그의 얼굴에서 그 어떤 부드러움의 흔적도 찾지 못하는 사이 미도리마가 말했다.

 "오늘은 고마웠어. 다음에 보답할게."

 키세는 미도리마가 벗은 헬멧을 받아 뒷좌석의 수납 공간에 넣었다.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자 미도리마는 몸을 돌려 카센터 안쪽으로 사라졌다. 키세는 근처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카센터의 진입로를 벗어나 도로로 들어섰다. 약속 장소인 술집을 찾아가는 동안 커브를 돌 때마다 헬멧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전에는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눈치챈 적이 없었다. 어딘가 불안하고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며칠 뒤에 키세는 미도리마가 새 차를 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그는 키세의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은색 쉐보레의 운전석에 앉은 미도리마는 조금 들떠 보였다. 조수석에 앉아 글러브 박스며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키세가 물었다.

 "은색 차를 타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도리마는 시동을 걸며 코웃음을 쳤다.

 "흰색은 너무 빨리 더러워져."

 "검은색은요?"

 "답답해 보여."

 키세는 그의 논리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표정만은 정말 진지했기 때문에 웃음을 참았다. 차가 출발했다. 키세는 그가 생각보다 운전에 능숙하다는 것에 놀랐고, 그가 제한 속도를 잘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그는 잠시도 멈춰서고 싶지 않은 것처럼 차선과 차선 사이를 넘나들었다. 새 차 냄새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주 빠르게 삼십 분을 달려 교외의 플라타너스 길을 지났다. 가로등이 켜 있긴 했지만 야간 드라이브가 권장되는 구간이 아니라 길이 충분히 밝지 않았다. 키세는 입 안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도리마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플라타너스 길을 지나서는 40번가의 파란 육교를 거쳐 시내로 돌아왔다.

 키세는 차에서 내려 운전석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유리를 톡톡 두드리자 미도리마가 창문을 내렸다. 키세가 물었다.

 "이게 오토바이 태워준 데 대한 보답인가요?"

 미도리마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키세가 물었다.

 "답례 한 번만 더 해주면 안돼요? 내가 커피 살게요."

 "뭔데?"

 키세는 최근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교양 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도리마는 경솔하다 싶을 만큼 확신에 찬 태도로 과제에 대한 조언을 내놓았고 이틀 후에 초안을 봐주겠다고 했다.

 "그럼 이틀 후에 잘 부탁해요."

 과제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것이라면 메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미도리마의 학교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마시면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과제를 들여다보았다. 미도리마는 빨간 볼펜으로 구절구절마다 토를 달고 지적을 했다. 과제를 살피느라 눈을 내리깐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가 엄격하게 말했다. 

 "키세, 집중해. 네 일을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

 그래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 리포트는 이미 제출한 지 한 달이 지난 과제였다. 달리 미도리마의 조언을 구할만한 리포트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들고 온 것뿐이었다. 키세는 왼쪽 팔을 머리 밑에 받치고는 비스듬히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너무 어려워요. 모르겠어요."

 미도리마는 눈을 더욱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키세는 엎드린 그대로 눈만 굴려 미도리마를 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미도리마의 얼굴 옆에 이제 막 잎맥이 선명해지기 시작한 어린 나뭇잎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도리맛치는 요즘 학교에서 어떤 거 배워요? 팔 부러진 거 알아보는 방법 같은 거 배워요?"

 "아니, 그건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아는 거야."

 "그냥은 몰라요?"

 "몰라."

 "그럼 뭘 배워요?"

 미도리마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키세의 코 앞에 수평으로 세웠다.

 "눈으로 따라와 봐."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키세의 얼굴 앞에서 좌우로 움직였다. 키세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그의 손 끝을 쳐다보았다. 미도리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키세가 물었다.

 "이게 뭔데요?"

 "뇌신경검사."

 키세는 어색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렸다.

 ", 이런 거 배우는구나."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왠지 안절부절못하게 된 키세가 억지로 다시 말을 붙였다. "공부 힘들지는 않아요?"

 미도리마는 다시 눈을 내려 종이에 메모를-객관성이 떨어지는 자료 사용, 신뢰가 가능한 통계 인용 요망- 적어 내려갔다. 키세는 그의 글씨가 주인처럼 단정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정말요?"

 "뭘 놀라는 거야?"

 "옛날엔 나보고 공부에 싫고 좋고가 어디 있냐고 했잖아요."

 미도리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가 그렇게 부드럽게 웃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키세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우리 누나들이 맨날 그런다구요. '공부 하기 싫으면 공장이나 가든가!' 이러면서......"

 "누나들이 동생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그렇죠?"

 키세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미도리마는 턱을 약간 들어올리고는 펜의 뒷부분으로 키세의 리포트를 탁탁 두드렸다.

 "너는 기본적으로 네가 관심 없는 일에는 노력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별로 없어. 하다못해 공장 일에도 노력은 필요해. 단적으로, 이 리포트도 그렇지. 나는 네가 이것보다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해."

 이 말을 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 자신만만해서 키세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그건 그렇죠." 그러나 사실 그 리포트는 키세가 나름 열심히 쓴 것이었다. "그래서 미도리맛치가 도와주잖아요?"

 이제 미도리마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고, 키세는 점점 더 자신이 불리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 노력론은 연애에도 통하나요?"

 과연 이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도리마의 세 번째 연애가 끝난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키세는 의기양양한 마음 반 염려 반으로 미도리마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긴 것 같긴 했지만 상처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

 "어느 정도요? 누군가를 좋아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적은 없어요?"

 "글쎄." 미도리마는 망설이며 대답했다. "노력이 나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 확실히 나쁜 건 아니지만."

 키세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턱을 괴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이제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대하는 미도리마의 무덤덤함을 비난한 적이 있었지만 이 순간 처음으로 그 이면에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은 관목 뒤를 뛰어다니는 참새처럼 특별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기척만을 남기고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높은 바람이 태양 앞으로 구름을 끌어당겼다. 키세가 미도리마의 귓불 뒤에서 반짝거리던 햇빛이 사라진 것에 주목하는 사이 그가 말했다.

 "내 연애에 관심이 많은 것 같군."

 "?"

 "너 말이야."

 "제가요?"

 "너도 노력을 할 때가 있어?"

 "노력이요?"

 키세는 연거푸 멍청한 대답을 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미도리마는 리포트를 다음 장으로 넘겨 오른쪽 구석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키세는 혀를 깨물 뻔했다. 제출일이라고 쓰인 글씨 옆에 한 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지난달이잖아. 이걸 이대로 제출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 지금 좀 열심히 배워."

 키세는 '나는 그런 노력은 하지 않아요.'라고 대답 할 수도 있었다. 혹은, '미도리맛치는 지금도 노력이 필요한가요?'라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미도리마의 표정을 살폈다. 알면서도 속아준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미도리마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의 흔적이나 한 조각의 호의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키세는 아무 말도 않고 뻔뻔스럽게 웃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미도리마는 날짜가 지난 리포트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주제와 관련된 참고 도서를 찾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미도리마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후에 곧장 집을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샤워를 하고도 고민을 하다가 도로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두 시간 후에 잠에서 깨자 낮에 느꼈던 분노와 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간의 피로와 자괴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저녁도 거르고 다시 한 번 샤워를 했다.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신발장 앞에서 스니커즈를 고르면서는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라고 말하는 미도리마를 상상하면 그 말끔한 얼굴을 한 대 때려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를 세 달 정도는 비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나들의 재미있어 하는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훤했다.

 '료타, 좋아하던 애가 소개팅 해줬다면서? 대단한걸! 역시 우리 동생! 연애라면 타고났지!'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밤 9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무작정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미도리마와의 일을 통째로 복기하다시피 했다.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 리포트에 적힌 미도리마의 글씨. 수많은 통화들과 문자들. 아오미네가 그들에게 '너네 요새 엄청 붙어다닌다?'라고 했을 때는 키세가 테이블 아래로 미도리마의 손을 잡기도 했었다. 그의 손가락은 길고 부드러워 봄철의 꽃 가지를 쥐는 것 같았다. 키세가 웃음을 터트리자 미도리마는 조용하고 무관심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키세를 쳐다볼 때 그는 항상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트릭이 감춰져 있는 문제를 풀 때처럼. 그러나 오히려 키세에게는 미도리마 본인이 영원히 알 수 없는 퀴즈와 같았다.

 미도리마는 노력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력?"

 저도 모르게 가시 돋친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키세는 오토바이를 길 한쪽에 세웠다. 좌석 밑에서 헬멧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짜증스러웠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헬멧을 꺼내 머리에 눌러썼다. 미도리마 따위는 잊고 곧바로 어디로든 가고 싶었지만 막상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는 즐겨 찾는 술자리와 모임에 얼굴을 비춘 지 오래되었고 그 때문인지 그런 자리의 분위기를 상상만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따금 술자리에 나갈 때가 있긴 했지만, 그런 곳에 갔다가도 금세 자리를 뜨곤 했었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우면 미도리마가 전화를 빨리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는 미도리마와 근처 공원을 걸었고 그가 좋다고 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미도리마가 좋아한다던 책은 허튼 구석이 하나도 없었고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키세가 그 책을 다 읽었다고 말했을 때 그의 눈에 스친 반짝거림은 마냥 차갑지만은 않았다. 아니, 차갑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키세는 흐려진 시야가 다시 선명해질 때까지 오른 발로 오토바이를 지탱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노란 불빛을 켠 차들이 빠르게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키세는 미도리마를 좋아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그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고 그래서 그가 좋아진 것뿐이었다. 그는 미도리마 역시 그러기를 바랐다. 거기의 어디에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으며, 어긋날 여지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도리마의 말대로 노력이 필요했다면자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 말 그대로 노력을 하면 좋았을 터였다. 다소 답답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착각과 오해로 환상을 쌓아놓고 키세에게 애정을 요구하는 철없는 여자애들보다는 그의 신중함이 훨씬 나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책임감 있는 관계의 시작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미도리마가 키세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면, 그래서 시험이 필요했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가 미도리마에게 기대하는 것은 즉흥적이고 열렬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키세는 난폭하게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미도리마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신호는 두 번이나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키세는 문자를 보내고는 시동을 걸고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술자리는 평소보다 길었다. 미도리마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취기가 오른 타카오는 그다지 그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물었다.

 "신쨩은 걔를 좋아하는 게 정말 맞는 거야?"

 미도리마는 영 다른 대꾸를 했다.

 "머리가 아파. 너무 마신 것 같아."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술잔을 다시 채워주며 타카오가 말했다.

 "있지, 너한테는 인내심 있는 상대가 필요할 것 같아."

 "별로 듣기 좋은 평가는 아니군."

 "아니, 딱히 네가 연애에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점점 더 듣기 불편해지는 것 같은데."

 미도리마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너는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보는 타입이잖아. 그래서 사람을 퍽퍽 밀어대니, 인내심 있는 상대가 필요하다는 거야. 그래도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왜 이러는 거야? 그런 문자를 보내는 건 전혀 너다운 일이 아니잖아."

 미도리마는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작은 술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그래. 이런 적은 없었어."

 "그래, 내 말이 맞지? 그러니까......"

 미도리마가 타카오의 말을 끊었다.

 "왜냐하면, 키세 같은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야." 단정적인 어조였다. "확인이 필요했다고."

 "무슨 확인? 그냥 널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일관성과 계획성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어. 믿을 구석이 없다고. 나는 그런 충동을 근거로는 어떤 결정도 내리고 싶지 않아."

 "만약 걔가 너한테 고백을 한대도 믿을 수 없다는 거야? 걔가 매일 너한테 문자 한다며. 학교에 찾아오고, 휴일이면 같이 시간을 보내고. 그런 거면 충분하지 않아?"

 미도리마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주말에는 같이 쇼핑을 갔어. 거기 어떤 여자애가 있었어. 하도 우리 주변을 서성거리길래, , 키세 주변에는 어디에나 그런 여자애들이 있지. 그런데... 그 녀석이 비겁하게... 나쁜......"

 그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웅얼거렸다. 

 "신쨩, 잘 안 들려. 괜찮아? 물 좀 마실래?"

 타카오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미도리마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그가 건네는 물을 받아 마셨다. 뱃속이 차가워지고 모든 것이 천천히 회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잠깐 쉬는 게 좋겠어."

 타카오가 말했다. 미도리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 테이블에서는 한참 전부터 유쾌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달콤하고도 나른하게 술집 칸막이 사이를 맴돌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편안하게 입을 셔츠가 필요하다고 하자 키세는 옷 가게가 늘어선 어느 골목으로 그를 데려갔다. 미도리마는 주로 백화점에서 옷을 샀으므로 그런 거리는 처음이었다. 키세는 시종일관 웃으면서 그에게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는 옷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들 옆에 붙어 있던 직원은 긴 머리를 왼쪽 귀 아래 묶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녀는 무척 친절했는데 사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잠시 키세가 미도리마에게서 떨어져있는 사이 직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애인 있으세요?"

 미도리마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여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너무 제 이상형이셔서요... 괜찮으시면 전화번호라도…..."

 그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가 빨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미도리마는 속으로 거절할 말을 골랐다. 그 때, 청바지 코너에 서 있던 키세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다 봤어요? 다른 데도 가볼래요?"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가게 입구에 서 있었다. 웃을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이었다. 미도리마는 여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가게를 나온 키세는 무척 빠르게 걸었다. 그는 옷 가게가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미도리마를 돌아보았다.  

 "으아, 내가 어색해서 죽을 뻔했잖아요!"

 키세가 웃음을 터트리며 미도리마를 살짝 밀었다. 재미있다는 듯한 그 웃음을 보자 미도리마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렇지만 곧이어 이어진 말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꽤 괜찮은 여자던데."

 키세는 그가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나를 두고 미도리맛치한테 번호를 달라고 할 수가 있지! 미도리맛치도 은근히 소질이 있네요. 한 번 만나보지 왜 거절하려고 했어요?"

 "내 타입은 아니었어."

 미도리마가 대답했다. 키세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고, 그 표정을 보자 미도리마는 미도리마대로 그 상황을 그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졌다.

 ", 너야 워낙 가리는 것이 없으니 괜찮아 보였는지도 모르겠군."

 키세는 잠깐 침묵했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아, 그러게요. 나한테 물어봤다면 번호 알려줬을 텐데."

 그 후로는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키세는 더 이상 웃지 않았고 미도리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불쾌한 자리를 피하듯이 황급하게 헤어졌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무엇인가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난을 치듯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고 그것이 미도리마를 망설이게 했다. 미도리마가 아는 키세는 원래 변덕스럽고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주 미도리마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뛰어났고, 또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여기 구겨졌어요.'라며 셔츠 칼라의 주름을 매만지고 미도리마의 목덜미에 손 끝을 스치는 솜씨는 놀랄 만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반대로 어떨 때는 놀랍도록 어리석었다. '과제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며 이미 제출한 리포트를 내밀 때처럼. 미도리마의 어리석은 문자에 더 어리석은 말로 대답할 때처럼. 가끔 미도리마는 어릴 적의 키세가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나한테 무슨 기대를 한 걸까요? 모르는 사이인데.'

 얼굴값이라니. 미도리마는 농담으로 그 상황을 넘겼지만 정말은 키세의 탓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다.

 '네가 그렇게 웃으면 그들이 착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정말로 네 탓이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키세가 또 길 잃은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고, 미도리마는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싫었다.

 옆 테이블의 노래 소리는 이제 익숙한 멜로디로 변해 있었다. 두꺼운 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타카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신쨩, 키세…..."

 미도리마가 중얼거렸다.

 "이제 그 녀석하고는 정말 끝이야."

 키세의 진심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동창들의 모임에서 아오미네가 그들 사이에 대해 물었다. 키세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아오미넷치, 질투해요? 내 사랑을 그렇게 못 믿겠어요?' 그러고는 술을 마시다가 테이블 아래로 미도리마의 손을 잡았는데, 미도리마는 그게 웃기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불쾌하다는 뜻을 담아 키세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하이볼이 가득한 긴 잔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투명한 얼음 사이에서 노란 술이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는 미도리마를 향해 상반신을 기울이고는 노래하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좋아요. 그렇죠?'

 미도리마는 묻지 못했다. 무엇이? 아오미네가? 달고 차가운 술이? 귓전을 간질이는 음악 소리가?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걸 수도 있었다. 미도리마는 남의 말을 이토록 여러 번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타인의 감정에 이렇게 신경을 쏟아본 적 또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성의 많은 부분은 키세에게 실망을 했을지 몰라도 그보다 더 많은 마음의 어떤 부분의 다른 가능성을 믿고 싶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쨩!"

 미도리마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타카오가 그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아까부터 전화가 오는 것 같은데."

 노래 소리는 옆 테이블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나고 있었다. 전화는 그가 휴대폰을 들자마자 끊겼고, 거의 동시에 문자가 도착했다.

 -집이에요? 그리로 갈 테니까 잠깐 시간 좀 내요. 

 타카오가 물었다.

 "신쨩, 괜찮아?"

 "이만 가봐야겠어."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팔에 걸쳤다. 타카오는 그의 표정에서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읽어냈다. 그는 놀리며, 그러나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끝이라며?"

 미도리마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까 한 말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혹은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뜻 같기도 한 동작이었다. 타카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도리마는 자리를 떴다. 

 

 금요일 밤 11시의 거리는 온통 화려한 불빛과 즐겁고 소란스러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겨우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하면서 미도리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키세에게 전화를 거는 편이 좋을 것 같았지만 전화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문자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고마워요! 잘 되면 한 턱 쏠게요!'라니. 그런 문자를 보내놓고는 열 시간도 훌쩍 넘어 그의 집으로 오겠다는 것이다. 그런 연락을 받고 친구를 술집에 버려두고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는 자신은 또 어떤가?

 그는 예전 여자친구들을 떠올렸다. 사귀기 전, 서로를 알아가는 동안 그녀들은 수시로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내용은 대개 미도리마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미안, 이런 영화 싫어할 것 같았는데.'

 '저기, 혹시 기분 상했어? 미안. 그 오빠는 그냥 전에 다니던 클럽에서 알던 사람인데......'

 미도리마는 그녀들이 무슨 맥락으로 그렇게 사과를 하는 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미도리마가 자신에게 실망할 것을 염려했고, 그 앞에서 저지른 사소한 실수들을 두려워했으며, 미도리마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 막상 교제를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사과하는 쪽은 미도리마가 되었다. 그는 그녀들을 좋아했고 노력을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는 사귀기 전 그녀들이 보여준 두려움과 거리가 멀었고 그 때문에 매번 사과할 일이 생겼다.

 '미안, 이번 주말은 너무 바빠서... 가능한 한 시간을 낸다는 걸 알잖아.'

 '머리를 잘랐다는 걸 몰랐던 게 아니야. 당연히 알았어. 그냥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 아니, 안 어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만약 다시 한 번 키세가 턱을 괴고는 그의 옆에 앉아서 '미도리맛치는 왜 차이는 줄 알아요?'라고 묻는다면, 무슨 말이든 대꾸를 하고 싶었다. 누가 잘못을 했는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의 불쌍한 연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끝이라고? 유감이군.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지.'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간단히 허물어뜨릴 수는 없었다.

 오피스텔 근처에서 택시를 내려 골목길로 들어서며 미도리마는 재빨리 현관 근처를 눈으로 훑었다. 가장 먼저 담벼락에 서 있는 익숙한 오토바이가 보였고 몇 발짝 더 걷기도 전에 현관 옆 연석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키세를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액정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표정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둘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키세가 그를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도리마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걸음을 늦췄다. 

 키세는 구겨진 바지를 탁탁 털고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눈가가 조금 붉었고, 왼 손에는 뭔가를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가죽 끈 끄트머리가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보고 미도리마는 그것이 오토바이 키라는 것을, 정확히 말해 그가 선물한 키홀더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왔어요?"

 키세가 말했다. 그리고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마주보기가 불편할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미도리마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키세가 그의 팔을 잡았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손바닥이 무척 차가웠다.

 "늦었네요. 어디 갔다 왔어요?"

 미도리마가 대답했다.

 "잠깐 친구를 만났어."

 "친구요?" 키세가 웃었다. ", 그렇죠. 금요일이니까. 즐거운 시간 보냈어요?"

 미도리마는 그의 빈정거림을 모른 척 했다. 

 "그래, 들어가서 얘기하지."

 "아뇨. 여기서 얘기해요."

 키세가 여태까지 붙들고 있던 미도리마의 팔을 스르륵 놓았다. 골목길은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다. 미도리마는 무엇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위화감의 정체를 더듬는 사이에 키세가 다시 말했다.

 "사진 보내준 거 잘 받았어요. 누구예요? 후배? 선배?"

 그는 미도리마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쏘아대었다.   

 "나를 언제 봤대요? 정말 나를 만나보라고 했어요?"

 힐난에 가까운 그런 질문들을 듣고 있자니 미도리마 역시 화가 치밀었다. 그는 엉망진창이었던 오늘 하루를 떠올렸고, 키세의 답장을 받았을 때의 끔찍한 기분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만나라고 했어? 네가 만나보겠다면서?"

 "진짜 내가 여자를 만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미안하지만, 그럴 거면 미도리맛치의 소개 같은 거 필요 없거든요?"

 "나도 잘 알지. 지난 번에 옷 가게에서도 그랬잖아. '번호를 알려줄 걸 그랬다고.' 그저 수고를 덜어준 것뿐인데, 뭐가 문제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미도리맛치 아니에요?"

 "?"

 "만나볼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건 미도리맛치 아니냐구요."

 "이 상황에 그게 논리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런 게 아니라면 나한테 왜 여자를 소개해줘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에요?"

 "내가 기대한 게 뭐였든 밥을 쏘겠다는 말은 아니었지. 가끔은 진지함이라는 걸 흉내라도 내 볼 생각이 들지 않아?"  

 "지금 내가 진지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거에요?"

 키세의 얼굴이 분노와 실망으로 달아올랐다.

 "여자를 소개 받겠냐느니 하는 소리를 한 게 누군데 그래요? 나는 미도리맛치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 했다구요. 내가 기대한 건 그게 전부인데!"

 키세가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허공을 휘젓는 손동작은 그의 습관이었지만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순간 미도리마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그가 물었다.

 "술 마셨어?"

 키세는 웃기지 말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말 돌리지 마요."

 미도리마는 키세의 주량을 알고 있었다. 취했을 때의 상태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키세는 취해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게 운전을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미도리마를 사로잡았다.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통 사고로 비참한 지경에 처하는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의 사진을 볼 때도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키세의 팔을 잡았다.  

 "정말로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몬 거야? 헬멧도 쓰지 않고?"

 키세는 몸을 비틀어 팔을 빼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연석 위로 올라섰지만 거의 동시에 미도리마가 다시 거리를 좁혔다.

 "정말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

 키세가 발끈하여 대답했다.

 "내가 멍청하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운데요, 미도리맛치야말로 정말이에요? 정말 지금 나랑 이런 얘기나 하고 싶어요? 헬멧을 썼니 마니 하는 얘기를? 그게 당신 같은 '똑똑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예요?"

 말하는 중간중간 키세는 몇 번이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그는 몸을 몸을 돌려 오토바이 쪽으로 향했다.

 ", 그래요. 됐어요. 이만 가볼게요."

 "아니."

 미도리마가 다시 키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가 말했다.

 "택시를 불러줄게. 그걸 타고 가."

 다행히 키세는 다시 그의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미도리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도리마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앞니에 대고 꾹 눌렀다. 떨림은 금방 가라앉았다.

 키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이래요? 내가 오토바이를 탄다는 걸 방금 처음 알기라도 했어요? '제 명에 못 살 거야.' 뭐 그런 얘기를 하려고 그래요?"

 미도리마는 딱 잘라 말했다.

 "넌 취했어."

 "안 취했어요." 키세는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말해봐요. 정말 이게 그렇게 중요해요? 바른 생활 원칙을 지키는 게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하냐구요."

 미도리마는 잠시 말을 그쳤다가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 

 "그런 게 아냐."

 키세는 이제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의 표정이 여전히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뭘 기대하는 걸까요?'라고 말하는, 미도리마를 두렵게 했던 어린애. 그러나 그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을 잊었다. 자신을 보는 키세의 시선은 물론이고 키세가 그에게 보낸 실망스러운 문자, 긴 시간 그를 괴롭혔던 불신조차 잠시 장막 뒤로 사라졌다. 어스름한 저녁, 가로등 불빛이 그늘을 드리운 키세의 볼을 살펴보던 시간만이 자석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미도리마를 둘러싼 공기가 변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입술 사이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중요한 거야. 네가 다치지 않길 원해."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미도리마가 한 말이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라도 되는 것처럼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도리마는 키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수많은 질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왜 그렇게 재빨리 여자를 만나겠다는 답장을 보냈는지, 그래 놓고 집 앞에 찾아오기로 결심한 건 대체 언제인지 같은 질문들이 한데 뒤엉켰다. 헬멧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여태껏 키세가 그에게 보여준 무수히 많은 관심의 표시들이 동시에 다시 떠올랐고, 그럼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들도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미도리마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를 불러 세우던 수많은 여자아이들처럼 그 역시도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게 착각일 수 있을까? 그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미도리마는 이런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 횡설수설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현재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필요한 이성적인 말 한 마디만을 생각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랬다.

 "걔를 만날 거야?"

 미도리마는 제가 한 말에 자기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키세는 ''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그는 미도리마가 보낸 문자 속의 여자를 떠올리고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꾹 닫았다. 그가 물었다.

 "어떨 것 같아요?"

 미도리마가 짐짓 진지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너와 별로 어울리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

 키세 역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둘러싼 초조하고 불안정한 분위기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그런가요?"

 그리고는 여전히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미도리마의 손을 떼어내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멀리서 한밤중의 도로를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키세가 선물한 라디오가 생각났다. 그는 그 라디오를 책상 앞 창틀에 올려두었다. 딱 한 번 전원을 켜 보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라디오 안에 건전지를 따로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도리마는 어이가 없었다. 그였다면 애초에 건전지를 넣어 선물을 하거나, 선물을 건넬 때 건전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을 것이다.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건전지를 샀고, 일주일쯤 가방 속에 넣고 다니다가 겨우 짬이 났을 때 라디오에 넣어보았다.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들었던 곡은 놀랍게도 키세가 그 해 봄에 입이 닳도록 부르던 노래였다. 그의 차 조수석에서, 오토바이 앞자리에서, 그와 함께 길을 걸으면서.

 당신과 나 둘이서. 둘이서만. 하늘에 성을 지어요. 이 모든 시간을 눈물로 흘려 보낼 순 없잖아요

 미도리마가 미소를 짓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그가 키홀더를 선물했을 때, 키세는 이미 달고 다니던 반짝이는 장식을 서슴없이 떼어냈다. 미도리마는 원래 키세의 키홀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막상 자신이 고른 키홀더를 나란히 두니 너무 수수한 것을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키세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호하며 그의 선물을 달았고, 그 후로 한 번도 예전 키홀더를 꺼낸 적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줄곧 이런 식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세가 말했다. 

 "'그럼 누가 어울리는데요?'라고 묻고 싶지만, 당황한 미도리맛치가 또 다른 여자를 소개해줄까 봐 못 물어보겠네요."

 미도리마가 말했다.

 "물어봐도 괜찮아."

 "그렇지만 다른 걸 물어보고 싶은걸요."

 "뭘 물어보고 싶은데?"

 그들은 아직도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키세가 조심스럽게 미도리마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내고는 양 손으로 그의 귀를 감싸 쥐었다.

 "나를 좋아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그는 미도리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그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듯이. 미도리마는 가볍게 현기증을 느꼈다. 키세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장난스럽게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그가 내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미도리마가 웃었다.

 "어떤지 확인해봐."

 키세의 손이 뺨으로 미끄러지며 미도리마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어진 키스는 달콤하고, 어떠한 노력도 질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키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들이 가까워지도록, 조금 더 가까이, 그저 두 사람만 남을 때까지. 환희와 미소가 그들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한 편 미도리마는 둘 사이에 언제나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키세는 건전지가 빠진 라디오를 선물하고, 신뢰가 가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을 것이며 미도리마는 가방에서 라디오를 꺼내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도 안 되는 문자를 보낼 때도 있을 것이다. 미도리마가 원했던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의 다른 연애들처럼 노력과 그에 따른 반응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방정식 또한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없는 아쉬움만은 남아 있었다. 그러한 아쉬움을 노력이라고 부를 수도, 착각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으며 미도리마는 키세가 속삭이는 사랑의 말 사이로 의식을 던졌다. 그는 한숨과 함께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쿠로바스/황+청+녹] 기억 2

※노말 소재 주의

 

 모든 변화들은 가장 원했던 것일지라도 슬픈 면이 있다. 우리가 뒤에 남기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에 다른 삶을 살기 전에 이전의 자신을 버려야 한다. -Antole France

 

 

 "아, 전화 받네. 지금 통화 가능해요? 네, 잘 도착했어요. 아내는 지금 자요. 많이 피곤해하네요. 그럼요. 당연히 혼났죠. 사실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싹싹 빌었어요. 나는 미도리맛치한테 처음 거는 거예요. 모못치한테도 전화 해야 되는데.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고 도와줬거든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지금은 좀 그렇고 내일 걸어야죠.

 미도리맛치는 괜찮잖아요. 어차피 혼자 살고. 아, 농담이에요. 그보다 결혼식 때 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미도리맛치도 멋있게 하고 왔던데요? 아내 친구들이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 걱정 마요. 그런 걸로 귀찮게 하진 않을게요.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걸었어요. 아내가 전화했었다면서요. 놀랐겠어요. 그냥 그 상황이 되니까 미도리맛치가 생각났대요. 내 친구 중에 그나마 믿음직스러워 보였다고. 어차피 친구라고 소개시켜 준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요. 미도리맛치한테는 미안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래도 그 전화가 미도리맛치한테 가서 다행이죠. 어디 엄한 사람한테 걸었으면 동네방네 소문났을 게 뻔하잖아요. 뭐, 그것도 그렇고 이것저것 고마워요. 미도리맛치가 아오미넷치한테 전화도 했다면서요? 아오미넷치가 말해줬어요.

 우리요? 만났죠. 얘기 못 들었어요?

 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지? 여행 가겠다는 말은 예전부터 여러 번 했어요. 아내는 그냥 웃고 말았죠. 아니, 사실 매번 그랬던 건 아녜요. 인정할게요. 하지만 거짓말 한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어요. 진심이냐고 물으면 어떻게든 둘러댔을 뿐이에요. 그냥 이야기를 하면, 그러니까, 내가 혼자 며칠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한다면, 그 때 당장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설명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허락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었지 내가 실제로 어딘가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냥 막연하게 결혼 전에 혼자서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죠. 어릴 때부터 한 생각인데. 미도리맛치는 그런 거 없어요? 대학에 가면 수염을 기르겠다거나, 첫 아이를 낳으면 그 해의 와인을 살 거라거나 하는 거요. 꼭 이뤄지지 않아도 되지만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그런 거.

 내가 아는 모델 중 하나는 결혼식 때 부케로 반드시 길고 하얀 꽃을 들기로 정해뒀대요. 카라 같은 거요. 그런 건 신부가 키가 크지 않으면 초라해 보인다나. 같이 화보를 찍을 때 들은 얘기인데. 그때 내가 스물 셋쯤이었나 그래요. 그 사람은 나보다 너 다섯 살은 더 많았을 거구요. 딱 지금 내 나이죠. 근근이 버티고 있긴 했지만 슬슬 모델 일을 접을 무렵이었을 거예요. 결혼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는 게 자기 꿈이었는데 마땅한 사람을 못 만나서 실망스럽다고 그랬죠. 그렇죠? 별 소릴 다한다고. 미도리맛치처럼 나도 딱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달리 말할 데가 없어서 그랬겠다 싶어요. 그 후로 오랫동안 그 누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러다가 지난 화요일, 그러니까 결혼식 닷새 전에 갑자기 소식을 들었어요. 연습실에서 다른 배우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건데 머리에 무슨 혹이 생겼댔나. 여하간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니었어요. 그러더니 순식간에 화제가 건강관리로 넘어가서는 뭐가 뼈에 좋고, 뭐는 혈관에 안 좋다느니 하는 걸로 아주 이야기꽃을 피우지 뭐예요. 난 듣기만 했어요. 그런 대화에 끼어들면 왠지 늙어버린 기분이라 싫지 않아요?

 네? 당연히 연극 연습이죠. 몰랐다곤 하지 마요. 정말이지. 내가 몇 번 티켓도 보냈잖아요. 이번엔 주연이에요. 처음으로! 아, 냉정해! 그래요. 솔직히 인지도 덕분이죠. 에이전시에서 배역을 따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어쩌면 나 연기에는 재능이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전에는 상상도 못했어요. 모델 일을 연습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거든요. 때로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 말을 빌리자면 '타고 났으니까'. 게다가 알다시피 정작 어릴 적에 내가 열을 올렸던 건 다른 거잖아요. 어쨌든 그런 건 다 상관없어요. 난 이걸 할 거니까. 그러니 그 날도 자정에 연습이 끝나고도 세 시간이나 더 남아 있었죠.

 밤에 혼자 연습실에 있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연습실 벽은 한 쪽이 다 거울이에요. 그게 싫어요. 그 앞에 서서 내가 하는 동작과 표정, 목소리를 관찰하고 점검하는 게. 평생 해 온 거나 다름없는 일인데도 그래요. 계속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애를 쓰고 있다 보면 결국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져요. 거울 속에 있는 게 꼭 내가 아닌 것 같고, 팔다리며 목소리며 하나같이 이상하고 낯설어져요. 차라리 누군가를 따라하는 거라면 자신이 있는데. 그것도 아니니까요.

 연습실은 그래도 그 정도죠. 더 심각한 건 연극 무대예요. 어떤 장면에서 나 혼자 무대에 남게 되면요. 갑자기 내가 그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런웨이에서처럼 그냥 앞으로 걸어 나갔다가 뒤로 돌아 나오고 싶어진다구요. 거의 그럴 뻔한 적도 있어요.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그게 그렇다니까요. 말도 안 되지 않아요? 열세 살부터 카메라 앞에 섰는데 새삼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진다니까요! 무대 밖 시커먼 어둠 속에서는 숨소리만 들리고, 등 뒤로 땀이 쏟아지고, 뭔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고, 하지만 뭔가를 해내고 있죠. 아주 훌륭하진 못해도 그럭저럭. 아, 가끔은 아주 훌륭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스포트라이트라는 게 나를 위해 발명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요. 일동 기립, 박수갈채! 하지만 잘했건 못했건 모든 것이 끝나고 농구처럼 명쾌한 느낌은 없어요. 누가 이겼는지 졌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무대에서 내려오면서는 이 짓은 절대로 다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요. 나도 가게나 차려야겠다고, 뭐든 간에 이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또 다른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거예요.

 그 날 새벽에 연습실을 나와서 느낀 감정도 비슷해요. 지칠 때까지 거울 앞에서 혼자 아득바득 애를 쓰다가 녹초가 되어서 주차장에 내려갔어요. 가보니까 침침한 불빛 아래에 내 차만 덩그러니 서 있지 않겠어요? 나는 차 쪽으로 걸었어요. 기둥 뒤마다 긴 그림자가 있었어요. 문득 주차장 어딘가에 누가 숨어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도나, 뭐 그런 거요.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있잖아요. 어릴 때에 비해서 겁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운전을 할 때도 예전보다 늦게 출발하고 액셀을 덜 밟죠. 아야카는, 아직 아내라는 호칭이 입에 잘 붙진 않네요, 아직도 내가 너무 거칠게 운전한다고 생각하지만요. 내 생각에는 나도 눈에 불을 켜고 건강식품 얘기에 열을 올리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죠. 글쎄, 아닐 수도 있지만.

 이제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누나는 내게 부케 얘기를 할 때 자기 머리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요? 나는 부케나 결혼식장의 모습 같은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어요. 닷새 후에 결혼식인데도 말이에요. 내가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온 주차장을 쩌렁쩌렁 울렸어요. 차 앞에 서서 문을 열기 직전에 무대 위에서와 똑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이걸 감당할 수가 없다고요. 하지만 난 도망치고 싶지 않았고, 결혼을 파토내고 싶지도 않았어요. 난 아야카를 사랑하니까요.

 그게 수요일 새벽일이에요. 이걸로 내 변덕이 설명이 될까 모르겠네요.

 그대로 주차장에 차를 두고 첫차를 기다렸다가 기차역으로 갔어요. JR을 타고 동쪽으로 갔죠. 뭘 했냐고요? 그냥 돌아다녔죠. 무슨 절에도 가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요. 나 신혼여행으로 스위스 다녀왔잖아요. 돗토리 풍경을 기억하기에는 스위스가 너무 강렬하지 않았겠어요? 수요일은 거기서 지내고, 목요일에는 카나가와에 있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간 건데, 막상 가니 할 일이 없더라고요. 딱히 카이조로 가려던 건 아니라서. 근처의 항구로 갔어요. 배라도 탈까 싶어서요. 다음 관광선은 두 시간 뒤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걸어 다녔어요. 조금 졸리기도 했고. 중간에 편의점에서 어묵도 사먹고요. 그래도 지루하더라고요.”

 거리는 어둡고 싸늘했다. 바다에는 부서진 나무 상자와 스티로폼 같은 쓰레기들이 떠다녔다. 흐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닫은 가게의 차양 밑으로 몸을 피했다. 옆 건물의 텅 빈 지붕 아래 비둘기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서 기름과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는 머플러를 풀어 손에 쥐고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작고 축축한 눈송이들은 어느새 비가 되었다. 키세는 자신이 눈이 비로 바뀌는 순간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순간을. 혹은 새벽이 아침으로 바뀌는 순간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켰어요. 심심해서. 어차피 몇 시간 후에는 다시 도쿄로 돌아갈 거고. 금방 다시 끄면 되니까. 그런데, 와, 각오는 했지만 액정에 안테나가 뜨자마자 미친 듯이 문자가 쏟아지잖아요! 실시간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몰랐으면 바로 다시 꺼버렸을거예요. 문자함은 차마 볼 엄두도 못 내고 부재중 통화만 넘겨봤어요. 그 중에는 미도리맛치 번호도 있었죠. 전화 걸었었죠? 6시간 간격으로 딱 두 번,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 누나들, 어머니, 아버지, 친구 몇 명. 에이전시에서 온 전화도 있고, 모르는 번호들도 몇 개.

 그리고 아오미넷치 번호가 있었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뇨, 한두 통이 아니었거든요. 마흔 통! 아오미넷치 혼자 마흔 통이나 나한테 전화를 걸었다고요! 난 아오미넷치한테 그런 집요한 면이 있는 줄은 또 처음 알았어요. 그 와중에 문자는 한 통도 없었죠. 그 사람 원래 문자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줄은 알았는데, 글쎄요, 제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아, 진짜, 장단 좀 맞춰줘요. 무슨 반성을 해요? 내가 뭐 영원히 도망갔나? 아오미넷치가 내 처남인가? 장인어른이에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엄청 궁금하죠! 일 년이 365일인데 그 중 마지막자리 다섯 번도 통화를 할까 말까 한 사람이 나한테 전화를 마흔 통이나 걸었는데! 그래서 나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누른 거예요. 신호음을 들으면서 엄청 조마조마했죠. 딱 삼십초. 삼십 초만 걸어보자.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기다린 것처럼 아오미넷치가 전화를 받았어요. 자다 깬 목소리였어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깬 것 같았지만. '야, 너! 어디야!' 이러기에 반사적으로 '왜요?' 이래버렸죠. 그랬더니 아오미넷치가 뭐라고 욕을 했고, 저도 뭐라고 대꾸를 하다가, 뭐,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카나가와에 있다고 말해버렸죠. 항구 이름도 말했던가? 말했겠죠? 아, 모르겠어요. 말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거 좀 창피하네요. 아오미넷치가 당장 이쪽으로 오겠다고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어요. 딱히 그 말을 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배도 기다려야 했으니까. 전화를 다시 끄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추웠죠. 그러고 서 있자니 어릴 때가 생각나더라구요. 우리 중학생 때. 아마 추워서 그랬을 거예요. 알죠? 아오미넷치 한겨울에도 반팔 위에 패딩만 달랑 걸치고 다니는 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 '뛰면 안 추워' 매번 그랬잖아요. 덕분에 허구한 날 미끄러운 빙판길을 뛰었죠. 한 번 발목이 부러지든지 머리가 깨지든지 해야 그 짓을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죠. 같이 보낸 겨울이 2학년 말 딱 한 번뿐이기도 했고요. 모르죠. 3학년 겨울에도, 그 다음 해 겨울에도, 아오미넷치를 따라 뛰어다녔다면 언젠가 사고가 났을지도. 그 때도 몰랐던 건 아닌데, 알면서도 그 뒤를 따라 뛰는 걸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정말... 어떻게 그만둘 수 있었겠어요?

 그럴 수가, 내 맘대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농구를 하는 아오미넷치는 정말 멋있었어요. 사실 지금도 경기 하는 걸 보면 멋있던데. 그땐 오죽했겠어요? 저렇게 움직일 수도 있구나,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구나. 그런 것들이 끝도 없었죠. 친구로서도 좋은 애였어요. 나는 아오미넷치가 멜론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 전에는 내가 열대 과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미처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나는 막내고, 아오미넷치는 외동이고, 나는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지만 아오미넷치는 남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미도리맛치도 알겠지만 사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인기가 많지 않아요. 아오미넷치는 두루두루 많은 사람들과 잘 지냈죠. 누가 아오미넷치 에 대해 물으면 테이코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이렇게 대답했을걸요. '아오미네? 괜찮은 녀석이지.' 나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가 정말 좋은 친구라서, 난 정말이지 처음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싶었죠. 때가 되면 다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아주 작은 바람들이 생겨나는 거죠. 집에 갈 때 날 기다려준다거나, 휴일에는 당연히 함께 시간을 보낸다거나. 뭐, 그런 거요. 둘이서 장난도 많이 쳤어요. 빗자루로 야구 하는 장난을 치다가 1층 유리를 깼던 적도 있잖아요. 기억해요? 무용실 유리였는데. 벌로 둘이서 거길 대청소하게 됐어요. 덕분에 그 날은 농구부 연습도 못 나가고. 담임선생님한테 혼나고, 체육 선생님한테 꾸중 듣고, 아카싯치한테 깨지고. 

 청소를 대충 할 수도 없었어요. 선생님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여기도 닦아라, 저기도 닦아라 하면서 감시했으니까요. 무용실 벽 중 두 군데는 전면 거울이었는데, 그래요 마치 연극 연습실처럼, 신문지로 그걸 다 닦아야 했죠. 창틀은 물걸레로, 바닥은 왁스칠하고, 무용실 바깥 유리는 수돗가 쪽에서 호스를 끌고 와서 닦았어요. 체육복을 입은 아오미넷치가 신나게 유리창에 물을 뿌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나는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어요. 젖은 유리창에 물방울이 맺혀서 바닥에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졌어요. 아오미넷치가 유리에 달라붙어서 이상한 포즈를 지으면서 장난을 쳤죠. 교정의 나무들이 그의 머리 뒤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어요. 누군가 지나가면서 우리를 놀리며 웃었어요. 우리는 말로는 발끈했지만 사실 웃고 있었죠. 바닥이랑 유리창을 다 청소하고 나서는 거울을 닦았어요. 거울에 비친 우리는 둘 다 맨발이었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른 걸레를 들고 있었죠. 나는 우리가 그렇게 나란히 서 있는 게 좋았어요. 청소는 다섯 시가 넘어서야 끝났어요.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죠. 선생님한테 검사를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죠. 걸레를 정리하고 있는데 아오미넷치가 문 쪽으로 가기에 선생님을 불러오려나보다 했어요. 그런데 문간에 서서 날 부르더라고요. 야, 가자! 그리고 손을 내미는데, 잡으라는 듯이... 글쎄, 나도 그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마음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게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고. 그게 무서웠죠.

 고백이 무시당한 다음에도 당사자를 계속 만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아오미넷치는 나한테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죠. 자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니 아니니 하는 것을 따져가며 친구를 사귀는 타입이 아니니까요. 안 그래도 속이 복잡한데, 그저 같이 있는 시간이 길고 나쁘지 않은 녀석이면 그걸로 충분했겠죠. 애초부터 자기 자신을 말로 표현하는 데 능숙한 타입도 아니구요. 그렇다면 속도 그만큼 단순하면 될 텐데 그게 또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모든 게 분명한데, 그땐 그걸 몰랐어요. 어렸으니 그랬겠죠."

 미도리마는 물론 알고 있었다. 키세는 종종 밤늦게 전화를 걸었다. 대놓고 고민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한 목소리로 중요하지도 않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다가 갑작스럽게 침묵하곤 했었다. 미도리마는 보통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는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공책에 의미 없는 글자를 끼적이다가 지웠다. 스탠드의 빛은 창백했고, 가끔 창밖을 보면 달이 떠 있기도 했다. 침묵의 끝에 키세는 울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잘 자라고,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도 미도리맛치한테는 신세를 많이 졌어요. 신기하죠. 미도리맛치는 별 말도 안하는데 나 혼자 내 얘기를 전부 털어놓게 되잖아요. 내가 지금처럼 주절주절 아오미넷치 얘기를 늘어놓는 동안 미도리맛치는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몇 마디 덧붙이거나 안경이나 추켜올리고 그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어요. 아마 내가 미도리맛치의 속내를 알려고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오미넷치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죠. 고백을 한 이후에는 더더욱요.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아내고 싶어서 안달복달했으니까요. 함께 있을 때 그 사람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면 내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매번 그런 기대를 했었죠. 그게 기대였는지 불안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런 일은 잘 없었어요. 인생을 통틀어 그 시절만큼 누군가와 붙어 다녀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 때만큼 외로운 시기도 없었죠.

 예나 지금이나 미도리맛치한테는 부러운 점이 있어요. 미도리맛치는 어디를 가도 인정을 받잖아요. 말랑한 구석이 없어서 욕을 얻어먹기는 해도 그렇게 똑같은 공을 몇 백 번씩 던져대는 모습에는 어딘가 모르게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면이 있으니까요. 아카싯치가 가장 인정했던 것도 미도리맛치였죠. 그게 부러웠어요. 나는 도통 그렇게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아카싯치랑 미도리맛치는 서로에게 기대하고 있는 게 있고, 서로가 그 기대에 부응했죠. 서로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는 건 아니에요. 미도리맛치는 할 말이 있으면 하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죠. 글쎄요, 나로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조금 싫어도 입 다물고 있는 게 더 편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미도리맛치는 꼭 자기 의견을 말했잖아요. 그래서 자주 아카싯치와 다투기도 했지만. 그게 두 사람이 친한 이유 아니었겠어요? ...미안해요. 괜한 소리를 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있잖아요, 두 사람 자주 장기를 뒀잖아요. 지나가다가 둘이 마주 앉아있는 걸 발견하곤 했었죠. 에어컨도 선풍기도 틀어져 있지 않은 교실에서, 땀도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죠. 그런데 얼마나 편안해보였는지 몰라요. 말소리가 들렸던 적은 거의 없지만. 말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아오미넷치한테 엄청나게 많은 말을 했어요. 하지만 결국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죠.

 그걸 인정할 때까지 정말 긴 시간이 걸렸어요. 그걸 깨닫지 못했었다면 난 아마 아오미넷치를 따라서 토오에 갔을 거예요. 하지만 명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직감적으로는 알았던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아오미넷치를 계속 좋아해봤자 득 될 것이 없다는 걸. 나한테도, 그한테도.

 믿어줄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감정은 제쳐놓고서라도 나는 정말 그를 도와주고 싶었어요. 혹시 그거 알아요? 아오미넷치가 연습을 빠지고 옥상이나 빈 교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있었잖아요, 그럴 때마다 아카싯치가 일부러 매일 열어두고 가는 문이 있었어요. 체육관 무대 뒤쪽에. 경비 아저씨도 확인하지 않는 쪽문이었죠. 아오미넷치는 종종 우리가 모두 귀가하고 나서 가끔 그 문을 통해 체육관에 오곤 했어요. 글쎄, 처음에는 나도 우연히 봤던 거예요.

 그 날 라커룸에 휴대폰을 놓고 갔었거든요. 그 바람에 집에 거의 도착했다가 다시 학교로 갔어요. 휴대폰을 찾아서 체육관을 지나치는데 누가 컴컴한 코트에 서 있지 뭐예요. 뒷모습이었지만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요. 아오미넷치였으니까요. 분명 스스로 농구공 트레이를 끌고 코트 한 가운데 간 것 같은데 정작 공에는 손 끝 하나 대지 않더군요. 그는 그냥 거기 서 있었어요. 골대를 보면서. 어쨌든 나는 차마 아는 척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태연하게 공을 던져 줄 수도 없었죠. 그가 울고 있을까봐 겁이 났어요. 해가 질 때까지 거기 서 있다가 나가버리더군요. 그 뒤로도 종종. 글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렇게 코트에 서 있는 걸 봤어요. 나중에는 아오미넷치도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서로 말을 걸지는 않았죠.

 아까 말했죠. 그는 좋은 친구였다고.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어요. 정말로. 무언가를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그것을 좋아할 수 없게 되다니. 내가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기분을 이해한다고 해서 꼭 도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겠어요?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도 시간은 흐르더군요. 그렇죠?"

 키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미도리마에게 자야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미도리마는 시계를 봤다. 새벽 두 반이었다. 하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키세는 웃었다.

 "뭐, 그건 그렇고.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요. 정말로 그 항구에서 아오미넷치를 기다렸어요. 아오미넷치가 말한 대로 꼼짝 않고요. 아 물론, 그 사이에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앉아 있긴 했지만. 글쎄,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아오미넷치는 한 시쯤 도착했어요. 휴대폰은 다시 꺼놨는데 용케 찾아왔더라구요. 길을 좀 헤맨 것 같긴 했어요. 내가 앉은 자리가 유리창 옆이라 아오미넷치가 모든 골목과 식당을 기웃거리면서 길을 올라오는 게 보였거든요. 나가서 이름을 부를까 하다가 그냥 기다렸어요. 얼마 안가 날 발견했죠. 먼저 삿대질부터 하더니 막 뛰어와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라구요. 그리고 휴대폰부터 낚아채서 '집에 연락해!' 이랬죠. 글쎄, 이미 했다고. 저녁쯤에 들어간다고 해놨다고 둘러댔죠. 거짓말이었는데. 의심하면서도 믿는 눈치였어요. 기왕 온 거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그랬죠. 아침부터 그러고 싶냐고 툴툴거리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아오미네는 젖은 야구모자와 점퍼를 벗어 옆 의자에 걸치고는 키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가까워졌는데도 항구는 조용했다.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음식과 술이 나왔다. 한동안 술을 마시다가 아오미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할 말 없어?'

 키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그가 너무 진지해서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해도 넋두리를 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키세는 테이블 가장자리로 시선을 내렸다. 반들반들한 은색 테이블 표면에 아오미네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키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오미네가 입을 열었다.

 '별 일 없는 거지?'

 '없죠.'

 이번에는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핀잔주고, 꾸중하고, 어린애를 대하듯이 달래는 식이었다. 그다지 논리적인 얘기는 아니었고 키세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키세는 그동안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뺨이 좀 더 홀쭉해지고, 머리카락은 좀 더 길었지만 소년 시절 몰래 훔쳐보곤 했던 얼굴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어보였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어른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한 구석에 어릴 적과 다를 바 없는 당황한 표정이 엿보였다. 횡설수설하던 그가 급기야 연거푸 술을 들이키는 것을 보고 키세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아오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정말. 이번에는 네가 잘못한 거야. 알아?'

 '알아요.'

 '가서 사과하면 괜찮을 거야.'

 '알았어요.'

 '진짜 아무 일 없는 거 맞냐?'

 '걱정 말아요.'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생각에 잠겨 개의치 않았다. 아오미네가 말을 이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기로 했다고?'

 '스위스요. 트래킹을 하자고 하던데.'

 '신혼여행에 트래킹을 한다고?'

 '트래킹이 뭐 어때서요? 아야카는 원래 활동적인 게 매력이에요.'

 '아, 그래.'

 '지난번에 아오미넷치 경기 티켓 보내달라고 했던 것도 아야카때문이었어요. 아야카가 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지난 시즌의 준결승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오미네의 팀은 60대 70으로 상대팀을 이겨 결승전에 올랐다.

 '네가 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아오미넷치가 농구하는 건 학창시절에 이미 질리도록 봐서.' 키세는 웃었다. '아야카가 아니었으면 안 갔을걸요.'

 아오미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리려고 한 말인데 그가 반응하지 않자 키세는 괜히 방어적으로 군 것 같아 머쓱해졌다.

아오미네가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요즘 농구는 어때요?'

 '좋지. 너는 할 만 해?'

 '글쎄요. 쉽지 않네요.'

 '그런 것 같더라.'

 '아오미넷치가 어떻게 알아요?'

 '인터넷.'

 '기사 봤어요? 좋은 얘기 없었을 텐데...'

 '그래도 상관없잖아. 넌 지금 그거에 완전 빠졌어.'

 키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죠.' 그리고 덧붙였다. '어……. 좀 쑥스러운데. 어떻게 알았어요?' 

 아오미네는 웃었다.

 '그걸 모르겠냐?'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세 시간쯤? 거기서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일어났어요. 비는 그쳤더라구요. 길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어서 조금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어요. 바다 쪽에서부터 서서히 하늘이 개고 있더라구요. 지는 해였지만. 수평선을 따라 반짝이는 끈이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었어요. 아오미넷치가 바다 쪽에서 걷고 있어서 그 흰색 끈이 그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죠. 그걸 보고 있자니, 전에도 아오미넷치와 이렇게 걸었던 적이 많다는 생각이 나더군요. 강가를 뛰기도 했고, 복도를 걷기도 했고, 길가를 걷는 날도, 농구 코트를 가로지르는 날도 있었죠. 늘 좋은 기억만 있지는 않아요. 난 아오미넷치가 앞서 뛸 때는 쫓아가느라 숨이 찼고, 내가 앞서 갈 때는 혹시 그가 따라오지 않을까봐 불안했어요.

 그의 뒤를 따라 뛰다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죠. 그 해에는 누나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취직도 하고 그래서 집이 자주 비어 있었어요. 나도 바빴지만, 어쩌다 일이 없는 날은 하루 종일 뒹굴 거리다가 거울을 보고 고백하는 연습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오미넷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말을 걸었죠. 그런 연습을 정말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진짜로 언제 고백했는지는 오히려 헷갈려요. 가끔은 고백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니까요. 아마 나는 그날, 그 무용실에서 처음으로 마음속으로 좋아한다고 말을 걸었을 거예요. 아오미넷치는 줄곧 모른 척 했어요. 못 알아들은 척, 이해하지 못하는 척. 그런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게 더 나를 오랫동안 헤매게 했어요.

 그때요, 내가 사라졌을 때요. 사실 나는 아오미넷치가 나를 찾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에게 친구를 줬다가 뺏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알았어요. 그렇게라도 끝을 내고 싶었을 뿐이죠. 감당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우리 집 앞에 찾아온 그를 보고... 나는 사실 내가 그 순간을 오랫동안 꿈꿔왔다는 걸 알았어요. 그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기를. 내가 계속 그에게 다가갔듯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도요.

 그 날의 감정이 희미해지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어요. 하지만 아오미넷치의 표정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더군요.

 미도리맛치, 연기를 하다보면 싫어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돼요. 

 아야카랑 갔다던 경기 말예요. 아오미넷치가 이겼다고 했잖아요. 사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제로 경기를 보러 간 건 처음이었어요. 내가 경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떨리던지. 코트 위의 아오미넷치는, 종종 텔레비전이나 동영상으로 보기는 했지만,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더군요. 그래도 가끔은 내가 알던 그 소년이 공을 던지는 것 같기도 했어요. 경기는 꽤 재밌었어요. 그런데 어이없는 게 있어요. 휘슬이 울리고 아오미넷치네 팀이 이긴 것을 확인한 순간 갑자기 마음을 졸이게 되더라고요. 아오미넷치가 프로가 된지 벌써 몇 년인데. 그럴 필요가 없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앉은 좌석에서는 아오미넷치의 정수리와 뒷목만 보였어요. 그는 코트 가운데에 혼자 서 있었어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나한테는 그게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곧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들이 다가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코트를 내려갔어요.

 경기장을 나오는데 아야카가 나한테 그러더군요. '저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구나'하고. 내가 아오미넷치에 대해서 얘기했던 적이 있거든요. 아니, 물론, 어디까지나 선수로서요. 예전만큼 챙겨보지는 않아도 나는 여전히 아오미네 선수의 팬이니까요. 이번 시즌에 아오미넷치네 팀은 우승은 하지 못했어요. 알죠? 하지만 상관없을 거예요. 

 뭐, 이제 와서 생각하게 되는 건 주로 그런 것들이네요. 몸싸움 끝에 골을 성공시켰을 때 우리가 질렀던 고함소리, 유리창을 닦던 어린애, 옆을 걷는 친구의 옆모습 같은 거요. 우리 어릴 때 말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팀메이트도 아니지만...

 미안해요, 푸념이 너무 길었죠? 진짜 나이 드는 거 같네.

 결혼식 때 아오미넷치랑 같이 앉아 있었죠? 좋아 보이던데. 언제 미도리맛치랑도 술 한 잔 해요. 아카싯치한테도 한 번 같이 가구요. 그래요. 고마워요. 잘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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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황+청+녹] 기억 1

※노말 소재 주의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은 그것들이 과거에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일 필요는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

 


 

 ", 그래, 그래. 알았다고. 잔소리 끝났냐? 그래. 이 시간에 전화를 걸면 니가 짜증 낼 줄 알고 있었지. 키세한테서 연락이 온건 아냐. 어차피 안 자고 있었지? 너야 늘 제때 못 자는 거 아니었어? 의대 들어간 후로는 늘 그래 보였는데. , 졸업했냐? 맞다. 전에 얘기했지 참. 사실 네가 전화를 꺼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낮에 키세, 뭐라고 불러야 되냐?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니까, 약혼녀? 여하간 그 여자한테서 전화를 받고 꽤나 경악했을 것 같아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신문에 실리는 것도 시간 문제야. '모델 겸 배우 키세 료타, 결혼식을 앞두고 돌연 잠적!' 그래, 좋다 이거야. 니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메리지 블루 뭐 그런 거일 수도 있지. 갑자기 총각 시절이 아까워져서 혼자 바람을 쐬고 싶을 수도 있다 이거야. 그래도 말을 해놓고 갈 수도 있잖아. 휴대폰은 왜 꺼놔? 물론 우리한테 말 안 할 수는 있어. 오히려 보고하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사흘 후면 자기 아내가 될 사람한테까지 비밀로 해야 될 이유가 뭐가 있냐? 내가 보기에 우리 중학교 동창들은 다 미친놈들이야. 개중에 내가 좀 정상이고. , 너도 썩... 아냐, 아냐, 끊지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 너는 정말 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냐? 방금 내 입으로 돌은 녀석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너는 뭐든지 완벽하게 해내는 녀석이니까 이런걸 느껴본 적이 없겠지. 하지만 너나 나나 친구가 많은 타입은 아니잖아. 키세도 그럴걸. 사실 나는 걔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 중학생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너랑 나도 그렇잖아? 너랑 걔도 그럴 거고.

 하지만 키세가 변덕스럽다는 건 알아. 아마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 거야. 애초에 농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렇잖아. 나는 그냥 농구 하나면 족해서 농구를 해온 거지만 그 녀석이 농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았어. 농구부, 동료, 한 눈을 팔 수 있는 모델일, 쫓아갈 수 있는 대상, 그래, 나 말이야. 걔는 원래 그래. 변덕스럽고 자극을 찾아 다녀. 새삼스레 놀랄 것도 없어. 늘 그래왔으니까.

 정말이야. 나는 걔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농구를 관뒀을 때도 놀라지 않았어. 대학을 자퇴했을 때도, 갑자기 잡지 화보가 아닌 TV, 그것도 드라마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어. 올해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물론 조금은 놀랐지만 정말로 마음 속 깊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했어. 열여섯 살 때부터 생각한 거야. 그 해 여름에 걔가 나한테 '우리 사귈래요?' 이렇게 말했던 순간에 이미 알았다고. '내가 이 녀석 때문에 오늘보다 더 놀랄 일은 없겠구나.'

 놀랐냐? 안 놀랐어? ,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 하는 소리야. 그래, 걔가 그랬었어. 어디서 그랬더라. 그때 우린 늘 붙어 다녔잖아. 언젠가 한번은 내가 일요일 새벽마다 조깅하는 개천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주에 거기 가보니까 키세가 와있더라고. 허리에 차는 촌스러운 가방까지 매고. 몸을 풀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왜 이렇게 늦었냐고 타박을 주더군. 매사가 그런 식이어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분이 잘 안 돼. 부실, 패스트푸드점, 공원, 옥상, 강당 무대 뒤, 운동장, 매점, 아파트 놀이터. 걔가 우리 집에 올 때도 있었어. 컴퓨터 게임을 하는 척 하다가 지겨워지면 근처 공원에서 농구를 했지. 너무 더울 때는 주차장에서. 경비한테 걸리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야 했지만 그게 대수였겠어? 우린 다 농구에 미쳐있었잖아. 걔는 테이코 건물에 비어있는 방이나 교실은 거의 다 열 줄 알았어. 비밀 번호가 같다고, 교무부장 모니터 앞에 포스트 잇으로 붙어있는 걸 봤다고 했어. 3학년 때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수업을 왕창 빠졌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데를 옮겨다녔지.

 그 중에 어디서 걔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운동장이었나? 체육관? 어쨌든 날씨가 더워서 하루 종일 진땀을 빼고 난 뒤였어. 난 기분이 별로였지. 걔가 사귀자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서가 아니라, 그럴 무렵이었어. 그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네. 늘 기분이 안 좋았지. 나한테 그럴 때가 있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키세는 아마 대각선이나 앞에 앉아 있었을 거야. 조금 떨어져서. 표정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사실 아오미네는 그 때 키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들은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있었다. 싸구려 조명은 식욕을 떨어트리는 흰 빛을 매장 전면으로 쏘아보냈다. 아르바이트생들 몇몇이 밀대로 매장 바닥을 닦고 있었다. 폐점 시간 직전이었다. 키세는 그의 옆 자리에 앉아 웃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코카콜라를 빙빙 돌리며.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냥 넘겨버리기로 한 거지. 그 무렵에는 농구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뭐든지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거든. 내가 몇 마디 더 대답을 하긴 했을 거야. 뭐라고 면박을 줬겠지. 아니면 웃었던가? 그리고... 그리고 잘 모르겠어.

 남을 이해하는 게 언제나 쉽지 않아. 마리 일도 그래. 그래, 내 여자친구. 전에 들은 적 있지? 헤어졌다는 얘기는 못 들었겠지만. 벌써 몇 달 전 일이야. 마리는 좋은 여자였어. 경기를 하다가 문득 관중석이 시야에 들어올 때면 언제든 마리가 거기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가끔 싸울 때도 있었지. 별 대단하지도 않은 것들로. 내가 친구들과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거나, 마리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거나. 나한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마리 주변에는 온통 결혼을 준비하고 있거나, 막 결혼을 마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지. 결혼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넌 상상도 못 할거다. 마리는 내가 왜 청혼을 하지 않는지 궁금해했어. 마리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혼기가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어. 그리고 '우리는'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마리의 부모님은 점잖은 분들이었어.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보통 집에서 먹을 것 같지 않은 요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어. 채 썬 생강을 올린 도미, 은박지로 손잡이를 만들어서 간장에 졸인 닭, 돌돌 말아서 육수랑 따로 내오는 국수 같은 거 말이야.

 내가 이렇게 음식을 자세하게 기억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래. 거의 먹지 못했어. 구경만 했지. 마리의 남동생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거든. 그런 말을 그런 자리에서 하는 게 이상하지만. 글쎄, 난 걔가 밉지는 않더라. 모르긴 해도 걘 자기 여자친구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을걸. 누나가 데려온 낯 모르는 남자나 갑자기 사근사근하게 굴며 처음 보는 음식을 잔뜩 차려온 엄마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야. 혹은 알고도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지. 고작 고등학생이었다고. 그 애는 그 말을 할 때 빼고는 아주 조용했어. 그게 더 그 집 가족들을 당황시켰을 거야. 임신이라도 시킨 거냐고 묻고 싶었을 텐데, 심지어 나조차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내가 있는 한 아무도 그렇게 물어볼 수가 없을 거 아냐.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했어. 현관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부엌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지. 마리는 울었어. 마리의 남동생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 몇 번 더 저녁 초대를 받았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거든. 마리도 남동생 얘기를 결코 하지 않았고.

 그 일 때문에 마리와 헤어진 건 아니야. 다섯 번이나 저녁 초대를 거절하고 나니 마리가 나를 찼지. 헤어지자고 한 건 마리지만 진짜 그러자는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글쎄, 나는 내가 그 집의 일부가 되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어. 그 집에 한 번 다녀오고 나니 그런 확신이 들더군. 처가살이 뭐 그런 얘기가 아니라. 마리와 함께 한 집에 살며 모든 것을 올바르게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 옥신각신하고, 서로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눈물 바람을 해 가면서 살고 싶은지 잘 모르겠더란 말이야.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헤어지는 게 마리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난 마리와 서로를 싫어하게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지. 나는 모르겠어.

 그래, 그렇게 된 거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매사가 그런 식이지 않아? 학생일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 공을 던져. 그리고 거의 항상 들어가지. 이번 시즌에도 나는 MVP상을 받았어. TV에서 내가 슛을 넣는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틀어줬는데, 정작 나는 그 슛을 넣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이게 내가 쏜 최고의 슛은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러지 마. 너도 알잖아. '어떻게'는 없어. 그냥 아는 거야. 중고등학교 무렵의 그 슛. 나는 내가 다시는 그 시절과 꼭 같은 느낌으로 '그래, 이거야.'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알아. 근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단 말야. 그 시절 내 기분이 어땠는지. 나는 아직도 가끔 코트에서 그런 눈빛들을 봐. 물론 그 때와는 조금 다르지. 프로 선수들 중에 농구가 놀이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부활동 같은 것도 아니야. 이건 직업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쉽게 체념하지 않아. 하지만 마냥 즐기고 있는 것도 아닌 거지. 나는 대부분의 선수들을 그렇게 지치게 할 수 있어. 나나 그들이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내가 농구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그럴 수 있는 확률은 점점 커지지. 그 중에는 지금 너희는 물론이고 어릴 적 너희보다 대단한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난 너희만은 그렇게 만들 수 없었어. 경기를 포기하게 만들 수 없었다는 거야. 나를 제외한 너희 모두가 농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이길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꺾을 수는 없었던 모습으로 멈춰 있고, 우리는 어쩌면 어렴풋하게나마 서로를 이해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유일한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어떻게 생각해? 듣고 있어?

 네 말대로야. 나도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스워. 이해니 뭐니 하는 얘기 말이야. 특히 키세에게는. 내가 본격적으로 연습을 빠지기 시작했을 때 네가 조금은 신경을 썼다는 걸 알아. 네 몫의 운동을 다 마치고 나서, 코트를 둘러보고는 내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는 했지. 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고 있었어. 나를 한심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하지만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것도 마찬가지야. 그냥 알 수 있었어. 안 그래? 짜증나는 담임이, 기억 나냐? 우리 담임 수학 선생이었잖아. 칠판에 어려운 문제를 써놓고 풀게 했지. 우리 중 누군가가 그걸 풀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네가 짓는 표정이 딱 그랬으니까. '너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너의 그런 점을 좋아하진 않았어. 대단하긴 하지만. 너는 의외로 귀엽게 굴 때가 좋았지. 이것도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네가 아카시보다는 나았어. 그 애가 코트 한 켠에 서서 팔짱을 끼고는, 근사하게 차려놓은 저녁식사를 망쳐버린 동생을 쳐다보듯이 나를 보고 있으면, 나는 그저 거기를 빠져 나오고 싶었어. 말 그대로. 내가 문제인데 어쩌겠어. 조용히 할 수 밖에. 아카시와 싸운 적도 있었어. 락커룸에는 우리 둘뿐이었지만 너는 부부장인데다가 그 녀석과 친했으니 들었겠지. 아카시는 이럴 거면 농구부를 나가라고 했어. 나는 그러겠다고 했지. 하지만 우리 둘 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키세는 좀 달랐어. 걔가 나를 보는 시선은. 하루는 일요일 오후에 키세가 집으로 찾아왔어. 그날 처음으로 조깅을 안 나갔거든. 걔는 혼자서 실컷 달리고 온 듯 운동복 차림이었지. 그 이상한 가방도 맨 채였고, 머리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어. 키세는 자기 혼자 조깅을 했다고, 오늘 아침 개천의 모습이나, 이름 모를 물새를 본 일, 내 몫의 초코바에 대한 얘기를 마구 늘어놓은 다음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어. 나는 약속 같은 거 한 적 없다고 말했어. 실제로 그랬고. 키세는 인상을 썼다가 웃었어. 그리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지.

 가족들이 다 친척집에 가서 난 혼자 비디오를 보고 있었어. 걔는 알아서 화장실에 찾아 들어가서 씻고, 내 옷으로 갈아입고는 내 옆에 앉았어. 무슨 영화냐고 묻지도 않고. 그대로 얼마나 영화를 봤는지 몰라. 커튼을 쳐놔서 거실이 어두컴컴했거든. 영화가 끝났을 때 키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어. 숨소리까지 쌕쌕 대면서. 입도 벌리고.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걔가 오늘 얼마나 많이 달렸을까 생각해봤어. 그 개천은 달리기에 썩 편안한 곳은 아니지만 사람도 적고 물이 아주 맑았어. 새벽부터 달리기 시작하면 숨이 차올 때쯤에 해가 떴는데 그러면 그 물 표면이 투명하게 반짝거리고 쌉싸름한 냄새가 진동했거든. 거기는 우리 집에서는 갈 만한 거리지만 솔직히 키세네 집에서는 먼 편이었지. 애초에 집이 반대방향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걔가 그리로 가는 이유가 뭐였겠어?

 그날 키세는 우리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갔어. 집 근처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 반쯤 억지로 집을 나섰지. 밖은 어두웠어. 우리는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어. 자동차들이 우리 옆을 지나칠 때마다 가로등 불빛이 흔들거렸어. 키세는 빌린 내 옷을 입고 있었어. 자기 옷은 땀에 절었다고. 그리고 그 옷이 마음에 든다고 했어. 꼭 돌려줘야 하냐고 물어봤지. 좀 들떠 보였는데 한 편으로는 뭔가 초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 그래, 난 걔를 잘 모른다고 말했잖아. 걸으면서 키세는 자기가 찾아본 프로 선수들의 플레이를 흉내냈어. 돌거나 뛰면서. 걔는 나만큼은 아니어도 좋은 선수였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 내가 아는 건 그런 거였어. 농구를 시작한 지 일년도 채 안 된 그 애가 움직이는 모습, 농구와 나를 대하는 맹목적인 얼굴 같은 거. 그런걸 보고 있자면 모든 게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지."

 그러나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또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용이 없었다. 키세는 내내 그를 이기지 못했다. 여름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푸른 빛이 과한 나뭇잎들은 오히려 지쳐 보였다.

 그는 아예 연습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미술부가 폐부 되면서 비어버린 교실에서 하릴없이 방과후를 보냈다. 키세는 연습을 하러 가자며 찾아왔다가 왕왕 그대로 같이 눌러앉아 버리곤 했다. 둘은 순찰을 도는 수위나 교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복도 쪽 벽에 바짝 기대 앉았다. 불 꺼진 교실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멀고 아득했다. 얇은 가을 구름이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잠이 깨기 직전에, 아오미네는 키세의 왼손이 자신의 오른 손을 감싸 쥐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앉아서 잠든 탓에 목이 뻐근했다. 소리를 내자마자 손 위의 온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밖은 어두웠다. 키세는 그의 옆에 앉아 지루한 듯 잡지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다 잤어요?'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립밤을 내밀었다. '입술 다 텄어요.'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오미네는 어색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무렵 키세는 부쩍 침울했고 변덕스러웠다. 미도리마와 자주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든 아오미네는 모른 척 했다. 그가 잠든 사이 손 등을 덮는 온기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슬그머니 손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나는 키세가 야구며 축구 같은걸 관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를 물어봤으면 대답해줬겠지. 하지만 묻지 않았어. 어쩌면 나를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냥 그런 가능성을 남겨놓는 걸로 충분했어. 그래, 그냥... 난 걔가 편하고 당연했어. 같이 있으면 즐거웠지. 걔는 줄곧 내 옆에 있었고,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따라줬어. 농담이나 호들갑으로 넘기는 듯 보여도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그랬다고. 정말로. 불편할 때가 있거나 말거나 걔는 내 친구였어. 그래서 나는 키세가 사라졌을 때 너무 당황했던 거야.

 걔의 기분을 아예 몰랐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사귀자는 말도 사실은 장난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원온원이라는 게 그렇잖아?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음에는 어디로 움직일 지 예측하는 시간이 못해도 삼분의 일쯤 된다고. 그런 걸 매일 지치지도 않고 하던 때니까. 그 때 키세의 태도는 이거였어. '네 골대 앞까지 오기는 했지만, 글쎄, 내가 골을 넣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네.' 그래서 그러기로 했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야. 실제로 걔는 나 때문에 상처 받은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어. 나한테 왜 연습을 안 나오냐는 둥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

 쿠로코에 이어서 키세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각자 진학할 학교를 고르고 있을 때였어. 쿠로코가 사라진 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던 일이었어. 하지만 키세는 사라진 줄도 몰랐어. 연말은 어수선하니까. 일이 많은가 보다 했지. 중학교 농구 제패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도 연대하게 하지도 않았어. 너나 무라사키바라는 덤덤했지. 아카시는 평소보다 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고. 토오에 가기로 결정한 날 문득 키세는 어디에 가기로 했는지 궁금하더라고. 너나 무라사키바라, 아카시가 가기로 한 곳이 어딘지는 들었는데 키세만 몰랐으니까.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어.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 했더니 거의 한 달 전이었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상하잖아. 키세네 반 애들에게 물어보니 잘은 모르지만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한다고 했어. 그 말을 해준 녀석은 키세를 고깝게 여기는 것 같았어. 말 끝마다 모델님 어쩌구 하며 빈정거리는데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한 대 쳐주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지.

 나는 한 달 동안 내 생활을 되짚어 봤어. 농구부는 공식적인 활동이 모두 끝났고 같이 시간 죽일 키세가 없으니까 의외로 수업은 충실히 나갔던 것 같아. 새로운 휴대폰 게임을 시작했고, 그 당시에 교실에서 근처에 앉아 있던 애들이랑 가끔 오락실에 다니기도 했지.

 키세한테 문자를 보낸 지 사흘쯤 지났을 거야. 몇 번 전화도 걸었지만 받질 않더군. 지루한 오후였어. 늦게까지 오락실에 처박혀있다가 거리로 나왔지. 유리 벽 위쪽에 붙어있는 환풍기가 빙빙 돌고 있던 게 기억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봤는데 역시나 아무 연락도 없었지. 새 문자 없음. 부재중 통화 없음. 그렇게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왼쪽에서 굉음이 들렸어. 그리고 오토바이 한 대가 코 앞을 스쳐갔지. 거의 치일 뻔했어. 비명 소리가 들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가까스로 인도 쪽에 넘어져 있었어. 들고 있던 가방은 저 앞에 팽개쳐져 있고. 순간 사방이 지독하게 조용하게 느껴졌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맞은편 가게의 간판 조명이 번쩍거리며 눈을 찔렀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완전 얼이 빠졌지만 어쨌든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났지. 팔꿈치가 얼얼하길래 살펴보니 살갗이 까졌더라. 근데 이상하지,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오락실에서 나는 소음이 참을 수 없는 거야. 일행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주머니에서 쩔그럭거리는 동전들도, 거기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이상스럽게 아른거리는 네온사인까지 전부 진절머리가 났어.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눈 앞의 장막이 걷힌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암막에 휩싸인 듯도 했지. 어리둥절했다고 해야 하나. 잠에서 깨어보니 길을 잃은 것처럼. 낯선 얼굴들이 날 둘러싸고 있었어. 일 년 전과 비교해보면 모든 것이 그저 나빠지기만 한 거야.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마지막으로 공을 던져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어. 그저 멍청한 휴대폰 게임에 열중해 있었지. 고등학교에 간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까? 그래도 키세가 곁에 있는 동안은, 나만큼이나 농구에 빠져 있던 너희들 틈에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는데. 너희들은 모두 앞으로 달려나가고 나만 뒤에 남겨진 것 같았지

 그래서 나는 열쇠도 없이 다짜고짜 길을 나섰던 거야. 사츠키가 키세의 집 주소를 알려줬어. 휴대전화 말고는 들고 나온 게 없어서 마냥 걸어야 했지. 길은 얼어 있었어. 얇은 운동화를 신고 걷자니 발바닥이 얼얼했어.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날이 추워서 하나같이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어. 나만 더듬거리며 헤매고 있었지. 주소만 가지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을 찾아가는 게 쉽지 않더라고. 하지만 무리해서라도 키세를 만나야 할 것 같았어. 꼭 그 날, 그 때. 그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난 걔가 어느 학교에 가기로 했는지 궁금했어. 걔를 만나면 문제가 생겼다고,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키세네 집은 내 생각보다 더 멀었어. 2층짜리 주택이었는데 온 창문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어. 저녁 시간이었으니까. 아마 식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벨을 누르니까 젊은 여자가 대답했어. 들어오라고 했는데 내가 그냥 키세를 불러달라고 했지. 그때서야 걔한테 누나가 있다는 게 기억났어. 몇 명 이랬더라. 한 명? 두 명? 동생은 없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애가 나오질 않는 거야. 십 분쯤 더 참았나.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더라고. 결국 한 번 더 벨을 눌렀어. 다시 아까 그 누나가 대답하고. 안에서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십 분이나 더 있다가 키세가 나왔어."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날카롭고 피로해 보이는 키세는 대문을 닫고는 골목 끝으로 아오미네를 끌고 갔다. 집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지자 그가 팔을 놓고 말했다.

 '갑자기 웬일이에요?'

 특별히 퉁명스러운 어조는 아니었지만 아오미네가 익숙한 어조도 아니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오미네는 얼굴을 찌푸렸다.

 ', 전화 왜 안받냐?'

 '왜 전화 했는데요?'

 '그건......'

 그는 입을 다물었다. 키세는 슬리퍼와 얇은 카디건 차림이었다. 밖은 영하였다. 한참 걸은 탓에 패딩 안에 입은 반팔 속으로 차가운 땀이 흐르고 있었다. 긴 이야기를 할 계제가 아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오미네는 처음으로 언제나 대화를 이끌던 것이 누구였는지 깨달았다. 입술이 말랐다. 머리가 띵한 것이 아무래도 감기가 걸릴 것 같았다. 키세가 왈칵 짜증을 냈다.

 '계속 그러고 서 있으려고요?'

 키세가 물었다.

 '왜 왔냐니까요?'

 '너 어느 학교 가기로 했어?'

 '카이조요. 아오미넷치는 토오로 정했죠?'

 '. 사츠키가 말해줬냐?'

 '그건 아니지만. 나야 아오미넷치 일은 언제나 알죠.'

 키세는 숨을 몰아 쉬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그는 키세가 할 말을 기다렸다. 아팠다거나, 바빴다거나, 무슨 말이라도. 지금처럼 낯설게 굴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굴든 좋았다. 웃는 키세, 그를 추켜세우는 키세, 장난치는 키세, 농구하는 키세, 끊임없이 떠드는 키세, 그를 좋아하는 키세.

 ', 추워 죽겠네요. 아오미넷치가 말할 생각 없어 보이니까 그냥 내가 말할게요. 나 아오미넷치가 여기 왜 왔는지 알아요. 안보이니까 신경 쓰였죠?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러라고 한 건 아니지만 신경 써주니 싫진 않네요.'

 키세는 제가 한 말에 제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오미네는 그의 입술 언저리에 익숙한 웃음이 설핏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제 됐어요. 어차피 곧 졸업이고. 다시 볼 일이야 있겠지만 이렇게 따로 만나는 일은 없게 하죠.'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불현듯 키세의 집까지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키세의 이야기를 듣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되물었다.

 '?'

 키세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긴 눈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조용하고 친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오미네는 그 얼굴에서 체념과 자조를 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오미넷치를 좋아하니까요. 사귀고 싶다고 했잖아요. 키스도 하고 싶고, 더한 것도 하고 싶어요. 어때요? 이래도 계속 모른 척 할 수 있어요?'

 주변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입이 얼어붙었다. 한참 뒤 아오미네는 뭐라고 대답을 했지만 스스로도 별로 중요한 말 같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듣고 키세는 한 번 더 웃었다.

 '못하겠죠? 이제 친구는 다른 데서 찾아봐요. 어쨌든 난 아니니까.'

 어느 샌가 골목길에는 싸리눈이 내리고 있었다. 키세는 그를 마주보고 서 있다가 그의 얼어붙은 얼굴과 긁힌 팔꿈치를 보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용건은 없는지 물었다. 아오미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키세는 집으로 들어가더니 목도리를 들고 나왔다. 키세가 목도리를 감아주는 동안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키세는 말했다.

 '괜찮아 질 거예요. 우리 둘 다.'

 스스로 다짐하는 듯한 투였다.

 '잘 가요.'

 그는 아오미네의 어깨를 꽉 쥐었다가 놓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도리마에게 이런 얘기까지 할 수는 없었다.

 "걔랑 거기 서서 얘기를 길게 하진 않았어. 그 땐 나도 화가 났던 것 같아. 내 인생에서 가장 친구가 필요한 날이 있었다면 바로 그 날이었을 거야. 하지만 키세는 나를 내쳤고, 난 슬펐다기보다 화가 나고 억울했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울었어. 돌아와서는 그대로 일주일간 감기를 앓았지. 독감이었어. 38도를 넘나드는 열에 시달리며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모르겠더라. 그 날 그렇게 헤어지고 졸업식 때까지 따로 키세를 만나는 일은 없었어. 막상 졸업식에서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고 고등학교에 와서는, 나로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경기에서 만나거나 해도 오히려 반갑게 굴었지."

 아오미네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그게 다야. 오늘 낮에 키세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들었을 때 내가 생각한 게. 걔는 괜찮을거야. 정말로. 정말 결혼을 파토 내고 싶어서 사라진 게 아닐 거라는 거야. ,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데면데면해도 봐 온 세월이 있잖냐. 걔가 청첩장 돌린다고 우릴 불러 모았을 때 기억 나? 그 때 걔 표정이 얼마나 꼴 보기 싫었는지 알잖아. 싱글벙글 해가지고서는. 그 약혼녀가 사츠키랑 둘이서 기모노 얘기에 열을 올리다가 가끔 키세를 돌아보면 걔 얼굴이 얼마나 환해지는지 너도 봤을 거 아냐. 자꾸만 서로 팔꿈치를 건드리는 것도. 그게 고작 삼 주 전인데. 걔가 그 사이에 결혼식을 이런 식으로 파토 내려고 생각했을 것 같아?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그 날 그 여자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너네가 나한테 키세를 떠넘겨놓고 가버리는 통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와인을 그렇게나 마셔놓고는 차를 몰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있는 대로 부리는 데 진짜 그 자리에 버리고 갈 뻔했어. 그날 따라 택시도 잡히질 않고. 결국 둘이서 지하철 역까지 하염없이 걸었어. 길에는 우리밖에 없었어. 차도 바로 곁의 큰 길이라 차 소리가 요란했지. 걔가 마리 얘기를 물었어. 나는 헤어졌다고 대답했어. 그러냐고 하고 더 묻진 않더군. 걷다 보니 조금 술이 깨는 것 같아 보였어. 담배를 피워도 괜찮은지 물어보더라고. 웃기는 놈이야. 아마 내가 운동선수라는 걸 배려한 걸 테지만. 안될 건 또 뭐야.

 하지만 정말 웃긴 건 그 다음이야. 걔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데, 그 빛 때문에 걔 손등에 있는 상처가 눈에 확 들어온 거야. 처음에는 술에 취해서 라이터 불에 데인 줄 알고 깜짝 놀랐어. 당황해서 손을 잡아당겨보니 화상이 맞긴 했지만, 오래 전에 생긴 흉터더라고. 분홍색이고 매끈매끈했지. 머쓱하게 손을 놓으니까 키세가 웃었지. 엄청 옛날 상처라고. 중학교 3학년 때 끓는 물에 데었다고 했지. 멀리서 보면 눈에 띄지 않지만 화보를 찍을 때면 손등에도 메이크업을 한다고 했어.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정도라면 그 땐 심하게 다쳤던 걸 텐데. 난 몰랐어.

 이봐 미도리마,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그 때 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걔 손등을 봤을 텐데. 먹던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떨어지기만 해도 난리 법석을 떨며 보고하던 녀석이 그런 얘기는 입도 뻥긋 안 했다는 것도, 손에 붕대며 밴드를 감고 다녔을 몇 달 동안 내가 한 번도 그걸 못 봤다는 것도 어이가 없더라. 하지만 정말 몰랐는걸. 믿을 수 없어도, 그게 사실인 거지.

 그래, 그런데도, 혹은 그래서, 나는 걔가 내일이나 모레쯤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걔는 정말 사라지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나는 알아. 십 년도 더 전에, 그 밤에 내 앞을 걷는 그 애의 얼굴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알고, 그 얼굴이 내게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알아. 걔랑 내가 서로에게 기대했던 게 조금 달랐더라도, 그래서 원망스러운 시간이 있었더라도 우리 둘 다 그 시간들을 아무 의미 없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건 같았었다고 생각하니까.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지만 안다고. 지금 내가 청첩장을 받고, 술에 취한 걔랑 같이 밤길을 걸을 수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니까.

 난 내일 한 번 키세를 찾아볼 생각이야. 어차피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만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그래서 그 예쁜 약혼녀 앞에 끌고가 울며불며 사과하는 꼴을 구경해준 다음 앞으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그걸 놀려먹을거라고. 걔가 날 뭐라고 생각하건,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 또, 몰랐거나 모른 척 했던 일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어떻게 생각해? 너도 같이 가볼래? 지까짓 게 멀리 가봤자지. 기껏해야 카나가와 아니겠어? 근데 설마 거길 갔을까? 하긴 미친놈 생각을 내가 알 게 뭐야. 내일 바쁘냐? 어때? , 미도리마, 자냐? , !"

 


[쿠로바스/황녹] Peach love 

: 몇 시간정도 투자해서 가볍게 써 봤어요. 캐붕주의..ㅋㅋㅋ


 주번들의 등교시간은 8시까지였다. 키세는 주번 활동을 싫어했다. 매번 하는 둥 마는 둥 다른 주번에게 일을 떠맡기기 일쑤였다. 일부러 일정을 만들어 오후 수업에만 참가할 때도 많았다. 키세가 그렇게 꾀를 부린다는 것을 담임이 눈치챈 것은 한 학년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키세는 반성하는 표정을 짓고, 너스레를 떨고, 웃어서 그 일을 넘기려고 했지만 결국 한 달간 혼자 주번을 맡게 되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년 일년 내내 화장실 청소를 시키겠다는 엄포를 들은 터라 어쩔 수 없이 꼬박꼬박 아침 8시에 등교를 하게 되었다.

 그가 주번 활동을 싫어하는 것은 교실 문단속을 하거나 칠판을 닦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 때문이었다. 해도 티가 나지 않고 줄지도 않는 그런 일이 싫었을 뿐 일찍 일어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등교해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일이나 서리가 맺힌 모래를 밟는 일은 꽤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이 지났을 쯤에는 아예 일찍 등교하는 것 자체에 재미를 붙여 가끔은 8시보다 더 일찍 등교하게 되었다. 미도리마가 매일 7 45분에 등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그는 언제나 전교에서 가장 먼저 등교하는 학생이었다. 교무실에 들러서 출석부와 열쇠를 가지고 교실로 올라가서 불을 켜고, 히터를 틀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 일련의 일과에는 늘 정해진 순서와 규칙이 존재했다. 미도리마 덕분에 그의 반 당번들은 아침 일과 중에 우유급식 준비와 칠판 닦기만 맡아 하면 되었다.

 키세는 매일 같은 복도와 계단을 통해 교실로 올라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 때문에 괜히 이리저리 루트를 바꾸어가며 교실에 올라가곤 했다. 그러다 미도리마의 반을 지나게 된 것이다. 미도리마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공책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키세는 들고 있던 우유통을 내려놓고는 복도 창문에 기대어 미도리마를 불렀다.

 "미도리맛치!"

 부르는 소리 이전에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미도리마는 그가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키세는 손을 흔들었다.

 "당번이에요?"

 "나는 원래 이 시간에 등교해."

 "진짜요? 왜요? 학교가 좋아요? 나는 당번인데!"

 키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한 달이나 당번을 맡게 된 사유를 설명했다. 미도리마는 의외로 짜증내지 않고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덟 시가 조금 넘어서 그는 이만 가봐야겠다고 했다.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세는 교실 창문을 닫으며 그가 다시 노트 위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운동장 쪽 유리창에 낀 성에가 그의 머리 위를 섬세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키세는 미도리마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그때마다 창문을 열고 이런 저런 말을 붙였다. 미도리마는 대체로 퉁명스러웠지만 말을 흘려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침 나절의 교실 복도는 차갑고 추웠다. 창문에 팔을 걸치고 서 있자면 미도리마가 앉아 있는 교실에서 자신에게로 따뜻한 공기가 흘러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 적느냐고 묻자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키세는 그가 책가방을 의자가 아니라 책상 고리에 건다는 것을, 등교하기 전마다 깨워주어야 하는 어린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늘 책상 오른쪽 모퉁이에 럭키 아이템을 올려놓는다는 것도 알았다. 키세는 늘 화제거리가 풍부하다고 자부했지만 미도리마와 대화를 할 때는 가끔 화제가 끊겼다. 그럴 때 미도리마는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듣던 자세 그대로 앉아서 키세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빤히 이쪽을 보고 있는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한 번은 은근히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학급 우유통에서 우유를 꺼내 미도리마에게 줘버렸다. 미도리마는 우유를 받으러 가까이 다가왔다. 키세는 그의 얼굴이 무척 하얗다고 생각했다. 그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키세는 그럴 틈을 주지 않고 교실로 가버렸다. 미도리마에게 줘버린 것은 키세 자신 몫의 우유였다. 키세는 그 날 우유를 먹지 못했다.

 두 사람이 그 이상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일은 없었다. 키세는 부 활동 때마다 아오미네의 농구에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미도리마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웃음이 인색하지 않았지만 키세의 앞에서 짓는 웃음과 다른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의 웃음은 제법 달랐다. 어딘가 숨기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슬그머니 웃는 얼굴 말고, 그냥 즐거워서 터트리는 웃음을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은 아카시나 아오미네와 얘기하다가 웃는 것을 보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도 그게 왜 웃긴지 알 수가 없어서-모범생이란!-그저 머쓱하게 웃고 그만이었다.

 담임과 약속한 한 달이 끝났다. 더 이상 아침 8시까지 등교할 필요가 없었다. 키세는 아침에 따뜻한 이불 속에서 삼십 분이나 더 뒤척일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그는 이마와 눈만 밖에 내놓고 이불 속에서 발을 꼼지락거리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아침 나절 창문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그 하얀 빛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매일 아침 15분간 혼자 교실에 앉아 있을 미도리마에게 마음 쓰였다. 어찌나 신경이 쓰였는지 미도리마에게 날도 추운데 남들처럼 천천히 등교하는 게 어떻겠냐고 참견하기까지 했다. 미도리마는 너야말로 이 기회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버릇을 들이는 게 어떻겠냐고 대꾸했다. 괜히 기분만 상하고 말았다. 키세로서는 그가 어떻게 매일 그렇게 규칙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 혹은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겨울은 점점 더 깊어졌다. 방학식 날에는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코 끝이 시린 느낌에 너무 일찍 잠에서 깨고 말았다. 집 안인데도 공기가 차가워 목이 칼칼했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겨우 넘어 있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방학을 앞두고 가슴이 설레는 기분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 뜨끈한 물로 샤워하고 일찌감치 학교로 향했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온 사방이 눈밭이었다. 하늘마저 눈이 시리게 희었다. 키세는 작게 감탄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방학 느낌 나네."

 혼잣말을 따라 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운동장에 도착하자 가장자리의 통행로를 따라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도리마가 와 있겠구나. 키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서둘렀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발자국을 찍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눈 조각들이 흩날려 머리와 눈썹을 적셨다. 2학년 교실은 3층이었다. 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신발에 잔뜩 눈이 묻어서 중간중간 미끄러질 뻔했지만 난간을 잡아가며 간신히 넘어지지 않았다.

 45분보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미도리마의 교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키세는 습관대로 복도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얼얼한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미도리마의 책상에는 예의 검은 가방이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그의 수학 노트가 놓여 있었다. 정작 미도리마는 없었다. 별 일이었다. 발이 시렸기 때문에 키세는 교실에 들어가서 미도리마를 기다리기로 했다.

 대체 언제부터 히터를 틀어둔 건지 교실 안은 은은하게 온기가 가득했다. 키세는 미도리마의 책상 옆 창가에 걸터앉아 성에가 낀 창문을 문질렀다. 유리가 살짝 얼어있어 완벽하게 닦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밖을 내다보기에는 충분했다. 유리에 이마를 바짝 가져다 대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나무들이 하나같이 흰 눈썹을 얹고 있었다. 넓은 운동장에 제가 만들어놓은 발자국이 뚜렷했다. 키세는 웃었다. 하지만 희기만 한 풍경에 금세 질려버렸다. 그는 유리에서 얼굴을 떼고 미도리마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얇은 공책이 단정하게 덮여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넘겨보니 반으로 접은 지면에 빼곡하게 수학 문제 풀이가 적혀 있었다. 보기만해도 기가 질려 몇 장을 휘리릭 넘겼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마지막 장으로부터 열 몇 장쯤 뒤 모퉁이에 작고 흐린 글씨가 적혀 있었다.

 '등교 시간에 운동장은 통행 금지.'

 맨 위에 적힌 날짜를 보니 지난 달 중순쯤이었다. 키세는 몇 장을 더 뒤로 넘겨 보았다.

 '우유.'

 마찬가지로 흐린 글씨였다. 마지막 글씨는 며칠 전이었다.

 '네가 일찍 오면 되잖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키세는 황급히 공책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모양이 처음 그대로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손을 딱 떼었을 때 앞문이 열리고 미도리마가 들어섰다.

 "키세?"

 그는 우유통을 안고 있었다.

 “웬일이야?”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빨리 와봤어요."

 미도리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유통을 교실 뒤에 가져다 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키세는 새삼스레 자신이 미도리마의 교실 안까지 들어온 적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설마 방학식 날까지 주번활동 하는 거예요?"

 "덕분에 일주일이 아니라 사흘만 했지."

 "전 한 달 했고요."

 미도리마가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키세는 괜시리 가슴이 간지러웠다. 미도리마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노트를 펼쳤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태연스레 키세에게 물었다.

 "계속 거기에 서 있을 거야?"

 키세는 벌떡 일어났다.

 ", 아뇨, 가야죠."

 "그래. , 그리고 이거 가져가."

 미도리마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캔 커피를 꺼냈다. 얼떨결에 받아들자 손아귀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키세는 이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미도리마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유의 답례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거의 삼 주 만에 처음으로 일찍 온 건데...'

 키세는 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캔을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하네요. 고마워요."

 미도리마는 또 예의 그 웃음을 지었다. 키세는 그 웃음 뒤에 숨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이따 집에 같이 갈래요?"

 "그래."

 "그럼 이따 봐요."

 “그래.”

 미도리마는 이미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키세는 서둘러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아직 인적이 드문 복도는 벽이며 바닥에서 냉기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려 아직도 교실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운동장에서 느즈막히 등교한 학생들이 눈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키세는 미도리마의 붉어진 귀를 떠올렸다. 첫눈이었다.

 

[창작] 조각

2013. 8. 31. 01:07

2011. 5. 15 백업 


젊은 날, 그들은 서로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 앞에 놓인 무구한 가능성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들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은 정수리 위부터 무한히 수직으로 뻗은 우주처럼 무구하고 머리 위에 매달린 칼날처럼 단호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자주,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으며 그 중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인지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모순에 놀라고 어리둥절해한다. 그들은 결국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찾아 정의내린 후에-‘그건 타고나는 거지’, ‘내게는 절실한 노력이 없었어’, ‘하나님의 뜻이야’, ‘아주 어린 시절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셈이지’ 등등- 그 사실을 잊는다. 잊지 못하는 자는 도태되어 사라지므로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잊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간혹 그 칼과 우주의 존재를 남들보다 뒤늦게 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의 눈 안에서 미처 지워지지 않은 공포를 보았다. 그들은 파도를 향해 뛰어드는 아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변의 뒤안에서 햇볕을 쬐는 어른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파도를 향해 뛰어갔다가 정신없이 모래사장을 향해 도망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류였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그들은 서로의 옷소매에 얼굴을 파묻고 시간을 견뎠다. 잊혀지도록. 

시간과 시간이 흘러서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아주 조금 남게 될 때까지. 그들의 가능성이 줄어들고 줄어들어 단순한 방정식처럼 끝내 하나의 답을 가질 때까지. 모든 고통이 사라져 젊은 날의 동료를 바라보는 것만이 유일한 고통이 될 때까지. 

그 때가 되자 그들은 서로의 소맷부리를 잘라 모래 사장에 묻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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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황녹] 후회의 형식에 대하여

※노멀 언급 주의


 '그래, 좋아' 키세는 생각했다. 그런 식이다. 미도리마가 '좋아, 완벽해.'라고 생각할 때와 키세가 같은 말을 할 때는 상황이 꽤 달랐다. 키세는 생각을 정리할 때면 사람이 없는 해변가를 상상했다. 넓은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 끊임없이 달그락거리는 수만 가지 모양의 자갈과 따뜻한 햇빛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미도리마는 그의 상상력이 빈약하고 내용은 진부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키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도리마의 모습들을 총동원해서 그가 상상할 내용을 대신 고민해 보았다. 몇 백 번째로 던지는 공을 다시 던지면서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슛을 쏜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나, 다리를 가지런히 내려놓고 오케스트라의 음에 귀를 기울일 때, 목덜미에 차갑고 뭉툭한 가위를 느끼며 가만히 고개를 숙일 때, 그럴 때 그가 상상할만한 것들에 대해서.

 한 가지 강렬한 기억이 있다. 칠판 앞에 서 있는 미도리마의 뒷모습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그런 모습을 볼 일이 없었으니 필경 중학생 시절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는 키세와 아오미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가 직접 작성한 노트를 들고 있었는데 반으로 접은 종이에 단정하고 완벽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키세에게는 그 광경,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글자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노트를 손에 들고,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그는 미도리마가 생각을 정리할 때는 머릿속에 하얀 공책을 편 다음-어쩌면 그 머릿속 노트에는 쪽수까지 매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진로 관련 문제는 1페이지부터 53페이지까지, 인간 관계에 관한 문제는 54페이지부터 60페이지까지, 생활과 관련한 고민은 61페이지부터 103페이지까지-머릿속 만년필로 자신의 생각을 쭉 적어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고 키세는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해도 세상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묘하게 과감했다. 만약 나쁜 일이 생길 것 같다면 온 힘을 다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그런데도 결국 그 일이 닥친다면, 허리를 쭉 펴고 앞을 보는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잖아."

 애인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미도리마는 그저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고 말았다. 키세는 그가 애인과의 결별에서 정확히 어떤 감상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미도리마의 휴일에 그를 서재나 연구실 밖으로 불러낼 사람이 하나 줄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자리를 누가 채우건 미도리마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게 틀림없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위치였다. 다른 사람의 위치는, 설사 그 위치가 자신의 옆이라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키세는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미도리마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갈래요?"

 미도리마는 그를 돌아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키세는 그의 얼굴이 희고, 속눈썹은 세상을 정돈하듯이 위 아래로 오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지."

 그리고, 그 다음은?


 그녀는 몇 년 뒤 미도리마의 아내가 될 여성이었다. 그 사이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테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 날 그녀는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 신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신발은 그녀의 발목을 너무 흔들리게 했다. 발가락을 긴장시키고 허리의 건강을 상하게 한다. 기타 등등. 하지만 그 신이 그녀의 가냘픈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키세를 알아보았다. ‘아, 모델이죠?’ 하지만 그 쪽으로 화제를 이끌어 가지는 않았다. 미도리마는 그녀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저 외국의 어떤 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다음에는 곧장 미도리마의 머리로 관심이 옮겨갔다. 

 그녀는 그녀가 즐겨 찾던 헤어샵의 스타일리스트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그래서 요즘은 그녀의 머리는 물론이고 미도리마의 머리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키세는 미도리마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키세가 알기로 미도리마는 결코 남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주무르도록 내버려두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그에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알았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키세는 소개해줄 만한 스타일리스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는 키세가 시간이 날 때까지 머리를 방치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곳에 가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미도리마 혼자였다. 

 키세는 문자로 헤어샵의 위치와 예약 시간을 알려주었다. 미도리마는 헤어샵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환한 조명 아래에서 거울 속 자신을 마주보는 시간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의자는 우스꽝스럽게 높았다. 구두 밑창에는 머리카락이 달라붙어서 며칠이 지나도 다 떨어지지 않았다. 어릴 적에 다니던 이발소가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점들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통통한 미용사는 그의 값비싼 셔츠 안으로 가운을 우겨넣었다. '어떻게 자르시겠어요?' 그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미용사는 눈을 내리깔고는 그의 대답을 되풀이했다. '지금 모양 그대로, 너무 길지 않게요'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머리를 자르는 도중에 거울 속에 키세가 나타났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미도리마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고개를 똑바로 하라는 표시였다. 미도리마는 으레 얼굴을 찌푸렸다. 키세는 줄곧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직원 중 하나가 아이스 티를 가져다 주었다. 너무 달았다.

 머리를 자르고 나면 그들은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대개는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정도였다. 언젠가 한 번은 영화를 본 적도 있었다. 이 말 속에 숨어있는 뜻은, 그러니까 그들이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키세는 그가 머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늦겨울부터 온 여름이 다 지나도록 그는 몇 번이고 그를 새 가게로 데려갔다. 거울 사이사이에 좁고 긴 광고판이 있는 곳, 카페처럼 꾸며진 곳, 나긋나긋한 손길의 여자, 혹은 남자들. 미도리마는 늘 같은 스타일을 고수했다. 미용사들은 끝이 돼지 꼬리처럼 가느다란 빗으로 그의 머리를 앞쪽으로 쓸어넘기며 새로운 제안을 하곤 했다. 가르마를 바꿔보면 어떨까요? 앞머리를 조금 더 잘라보면 어떨까요? 그러나 미도리마가 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언제나와 같게 해줄 것. 하지만 그의 머리는 점점 짧아졌다. 결국 그 어느 곳도 흡족하게 머리를 손질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키세가 끝없는 추천을 그만두도록 하거나, 머리를 자를 때 그녀를 데려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키세는 주소를 보내는 대신 직접 미도리마를 데리러 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머리 자를 필요 없어 보여요."

 그리고는 뒷좌석에 달린 주머니를 뒤적여 팜플렛을 꺼냈다. 클립으로 티켓 두 장이 끼워져 있었다. 표지에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칭찬했던 피아니스트의 사진이 있었다. 

 "대신에 이거 가요." 

 차는 시내 한가운데를 달리는 중이었다. 미도리마는 차를 세워달라고 말 할 수도, 다시 병원 앞에 자신을 데려다 놓으라고 말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키세는 아주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미도리마에게 거절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다. 

 연주회는 만족스러웠다. 그가 늘 피아노 연주곡만 듣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해주자 키세는 다양한 연주회 티켓을 끊어왔다. 연주회를 다녀올 때마다 미도리마는 밤잠을 설쳤다. 그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았다. 온 집이 고요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밤마다 한 침대에서 늙어갔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여동생은 아직 꼭두새벽에 잠을 깨어 창 밖을 내다볼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 새벽, 창가의 나무들이 비바람에 요동치고, 익숙한 음정들이 귓불을 따라 스르륵 미끄러질 때, 그는 다음 날의 근무를 위해 수면제를 먹곤 했다. 그는 침대에 누워 넓은 칠판을 생각했다. 분필이 사각거리며 흑판 한 가득 세계의 지도와 연표를 그렸다. 방정식의 해답과 산맥의 위치와 누군가가 태어나고 죽은 날짜들. 말끔한 방 안에는 그와, 이미 정해져서 다시는 바뀔 일이 없는 사실들이 있었다. 그는 의사가 되었다. 사람들을 치료했다. 간혹 실수가 있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일을 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것도 피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도 나이가 들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것만큼 결혼이 빠르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일본을 떠났다. 공항 커피숍은 혼잡했다.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울었다. 그리고는 변명하듯이 미래, 꿈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지만 미도리마에게는 와 닿는 것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정한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그녀 또한 그런 자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붙들어 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떠나기로 결정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티스푼을 들었다. 커피를 저으려는 생각이었지만 그 이상 커피를 마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티스푼을 내려놓고는 그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지겠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그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양 손에 이것저것을 짊어지고 낯선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게이트까지 캐리어를 끄는 것을 도와주었다. 두 달 후, 그는 스물 여덟이 되었다. 


 호텔 방에 가기를 원한 것은 키세였다. 편안하고 사적인 장소가 필요했다. 관계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미도리마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이 부족했다. 사흘 만의 퇴근이었고 퇴근 직후에 키세가 예매해 둔 음악회를 보고 나온 길이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틀째의 야근이 확정되었을 때 키세는 연주회 표를 취소하려 했다. 전액을 환불 받을 수는 없겠지만 돈은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키세는 걱정하는 말이나 되묻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지난 2년간 그랬듯이. 

 그들은 서른 살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미도리마의 약혼녀가 돌연 유학길에 오른 이후로 두 사람을 줄곧 연인들이 할 법한 일들을 함께 해왔다. 먹고, 마시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침대를 같이 썼다. 미도리마는 목욕을 할 때 욕실 문을 조금 열어놓았다. 키세는 거실에서 신문을 읽으며 그가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을 크게 틀어주었다. 욕실에는 가운이 두 벌 걸려 있었다. 

 그런 식이었다. 그들은 육체적인 접촉을 제외한 사실상 거의 모든 일들을 함께 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한 번쯤 얘기를 꺼내볼 수는 있었을 터였다. 조금 긴 포옹, 지나가듯이 스치는 입술. 이전에 키세는 누구보다 그런 것에 능숙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지난 2년 사이에 그런 능숙함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듯 했다. 키세는 차마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할 수 없었다. 해가 갈수록 그는 미도리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끝내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 갈래요?’ 그게 키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안이었다. 키세의 오피스텔은 미도리마의 본가보다 그의 직장에 더 가까웠다. 더 조용했고, 더 많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키세도 있었다. 그게 얼마나 의미를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미를 확실히 하는 것은 키세에게 언제나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미도리마가 저녁을 걸렀기 때문에 룸으로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은색 쟁반에 소세지, 크래커, 차가운 과일과 함께 맥주가 올려져 있었다. 호텔 종업원은 미심쩍다는 듯이 두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키세는 그런 시선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 빨리 그런 불쾌한 눈초리를 알아차렸고, 불안해했다. 미도리마는 알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키세에게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의 문제는 그런 것보다 구체적이고 물리적이라고. 지금은 그런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는 아주 지쳐 있었다. 그는 키세가 가벼운 얘기를 꺼내기를 원했다. 그가 맥주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기력을 회복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귓전에 남아있는 음악의 여운으로 아픈 사람들의 불평, 뻣뻣해진 다리와 기억해야 할 문제들을 잠시 미뤄두고 싶어한다는 것을 키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대답해줘요."

 미도리마는 거의 애원하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키세는 고개를 저었다. 미도리마는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긴 앞머리가 눈썹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머리를 자르러 가야겠다.' 키세는 생각했다. '내일쯤에. 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곧 초조해졌다. 고작 이틀 뒤면 출국이었다. 프랑스, 파리. 함께 일했던 디자이너가 그를 위해 추천서를 써 주었다. 지난 달에 키세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그의 회사가 얻어준 오피스텔에 찾아가보았다. 현관이 넓은 집은 오피스텔이라기보다는 주택에 가까웠다. 방은 네 개였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뒤뜰도 있었고, 몇 분 걸으면 돌로 만든 짧고 높은 다리가 있었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미도리마는 짧게 대답했다. 

 "안 된다고 했을 텐데." 

 그는 아주 지쳐 보였다. 

 "대답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고. 지금 너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요?’ 키세는 되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미도리마는 궁지에 몰릴수록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키세가 관심 있는 것은 진실이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방 안을 왔다갔다하다가 걸음을 홱 틀어 미도리마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테이블 위에 구겨진 담뱃갑이 있었다. 한 개피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시자 희뿌연 연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는 새로 한 개피를 더 뽑아 미도리마에게 내밀었다. 

 "좀 피워요."

 미도리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체력상의 문제로 담배를 멀리하고 있었다. 키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그는 결국 담배를 집어들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맥주가 식고 있었다. 방 안에 연기가 가득 찼다. 키세는 창문을 열었다. 18층 아래의 차들이 웅성거리며 도로를 박차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옅은 바람이 미도리마 주위의 연기를 걷어냈다. 부드러운 실내등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키세는 그의 광대뼈 아래 평평한 공간에 빛이 고여있는 것을 보았다.  

 키세는 낮은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했다. 그 동안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그가 느꼈던 무수히 많은 감정들에 대해서. 미도리마는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들었다. 키세는 담배를 입가로 가져가는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흰 담배가 반복적으로 짧은 궤적을 그렸다. 키세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의 생활을 생각했다. 그들이 살던 집은 비워질 것이다. 그는 여전히 깨끗한 옷을 입고 직장에 출근할 것이다. 

 그를 프랑스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키세는 그곳에서 할 일이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키세조차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키세가 원한 것은 미래의 일이었다. 귀국은 4년 후였다. 만약 그 때 그가 혼자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 때는 내가... 키세는 조금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혼자일 리가 없다. 갑자기 스스로가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미도리맛치가 손해 볼 일은 없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내가 뭘 부탁할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는 거예요?"

 "모르겠어."

 "딱 한 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줘요. 내가 돌아오면…."

 키세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세는 독백을 멈췄다. 거의 대답을 얻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빈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미도리마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침대로 가서 옷을 입은 채로 그 위에 쓰러졌다. 키세는 가까이 다가가서 이불을 그의 상반신에 끌어 덮었다. 미도리마는 내버려 두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키세는 그의 수척한 눈꺼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고마워요."

 미도리마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키세는 테이블 위에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놓고 나왔다. 데스크에는 체크아웃 전에 모닝콜을 부탁해두었다. 

 출국하는 날 미도리마는 공항에 오지 못했다. 짧은 통화가 끝나고 키세는 비행기에 올랐다.


 키세가 그렇게 자주 웃는 것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자존심을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너는 너무 자존심을 세워.' 키세는 또 웃었다. '미도리맛치가 아니라 제가요?' 그린 듯한 웃음이었다. 실제로 그 얼굴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키세와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키세는 조심스러웠다. 너무 조심스러웠던 나머지 두 사람이 연주회에 갔다가 호텔방에 묵었던 마지막 밤 이후에 미도리마는 그가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에 침범해 있었는지 깨닫고 놀라곤 했던 것이다. 

 키세는 가끔 집에 꽃을 들고 오곤 했다. 보랏빛 다알리아, 장미, 수국, 붉은 카시스. 그는 말했다. ‘팬들이 줬어요.’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가 지쳐 있을 때마다 팬이 꽃을 보낼 리는 없었다. 굳이 거짓말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키세도 그가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존심과 난해함. 미도리마는 이따금씩 생각했다. 그런 것이 문제였을까?

 아내와의 결혼식은 분별력이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에 부부는 본가에서 그의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창문에는 긴 커튼을 쳤다. 벽에는 두 사람의 결혼 사진이 걸렸다. 미도리마는 차라리 그 자리에 그림을 걸고 싶어했지만 어머니의 바람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밤 늦게 돌아와 시장기를 채울 때면 아내는 졸린 얼굴로 식탁 맞은 편에 앉아서 그가 가벼운 요기거리를 씹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내의 머리카락은 해가 갈수록 더욱 검어졌다. 처녀적의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부드러운 살이 붙었다. 그는 그녀를 몹시 사랑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을 염려했다. 어린 여동생은 대학생이 되었다. 그 아이는 늦여름의 송어처럼 건강하고 제멋대로였다. 어머니는 조심성이 없는 그녀를 걱정했다. 그는 부쩍 눈물이 많아진 어머니를 걱정했으며, 여동생은 제 오빠가 새 언니를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두는 것을 타박했다. 

 어느 겨울 그는 응급실에서 병원 직원이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교통사고였다. 퇴근 시간에 병원 근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도로에 피가 낭자했다. 경찰이 와서 스프레이로 바닥에 사고 현장을 표시했다. 사람들은 끔찍하다고 말했다. 간호사들은 그가 차에 치일 때 횡단 보도 건너편에 한 간호사가 있었다고, 그 간호사를 보고 급히 길을 건너던 게 틀림 없다고, 두 사람이 함께 옥상에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수군거렸다. 그 날 그는 집안 일을 핑계로 휴가를 냈기 때문에 병원 근처에 있었을 이유가 없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망한 직원의 아내도, 소문 속의 간호사도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음험한 기대와는 달리 스캔들은 더욱 커지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집으로 돌아와서 심하게 감기를 앓았다. 너무 무리를 한 탓이었다. 열이 끓었다. 꿈 속에서 누군가가 응급실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너머는 청색 커튼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는 몇 번이고 커튼을 밀어젖히고, 청진기를 귀에 꽂고,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가끔씩 무슨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잠에서 깼다. 아내는 그의 옆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아있다가 이마에 놓인 수건을 갈아주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크로키 북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 안에서는 언제든지 고독 밖에는 본 것이 없었다. 방안은 고요하고 말끔했다. 그의 몸은 어두침침한 그림자 속으로 한없이 꺼지는 듯 했지만 정신만은 몇 번이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비를 맞으며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야 했다. 그는 어렴풋이 걸어다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가 몇 년 전 그랬듯이 그의 여동생도 잠을 설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우리의 삶은 한 번뿐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져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는 방법이란 없으며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발소리는 옆 방의 아내가 수통을 비우기 위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한낮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서 흐릿한 흔적 같은 구름들이 하늘 위를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깨어난 것을 보고 아내는 차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작업복인 긴 치마를 입고 침대 옆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 방을 하나 얻어야겠어요. 내가 작업을 하느라 왔다갔다하는 게 오히려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아서...... 이번에 아픈 걸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녀의 작업실은 침실 바로 옆에 있었다. 그 방이 아니라도 방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그녀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고는 방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집을 걸어나갔고, 드문드문 돌아오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가끔은 그도 환자들에게 그런 말을 해야 했다. 그는 정확하게, 그러나 에둘러 말하는 법을 배웠다. 2년의 유학 생활 동안 그녀도 그런 것을 배웠을지도 몰랐다. 당신은 죽습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1년 후에. 수술을 한다면 고통 속에서 2년 후에. 운이 나쁘면 그보다 조금 후에. 

 그러나 그 메일은 아주 솔직했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 7시, B호텔 바.' 

 메일을 읽고 나서 미도리마가 곧장 그 호텔에 갈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 호텔에 묵었던 날 저녁에 들었던 난해한 현대 음악을 생각했다. 연주를 듣는 동안 키세는 아주 지겨워 보였고 이따금씩 미도리마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아마 자신은 몰라도 미도리마는 그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미도리마는 그 작곡가가 쓴 책을 읽어본 적은 있었다. '...아마도 나는 전통으로부터 아주 멀리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비밀스럽게 탯줄을 붙잡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우주비행사가 우주선과 코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게 우주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식의 모호한 얘기들이 600페이지가 넘게 이어졌다. 미도리마는 그 작곡가의 음악은커녕 책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의 끝에 오래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함께 살 때,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자신의 책상 서랍 속에서 서류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베에 있었다. 서랍 속에는 편지로 받은 학술회의 등록번호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멍청했고 회장은 너무 더웠다. 짜증이 나 있었다. 키세는 전화로 등록 번호를 불러주었다. ‘맛있는 거 사와요.’ 그는 뭐라고 핀잔을 주었고 전화를 끊었다. 

 서랍에서 필요한 서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안을 늘 완벽하게 정리해두었다. 후에 집에 돌아와서 그는 그 서류 제일 위에 있는 그녀의 편지 두 장을 보았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종종 편지를 보내왔다. 키세는 겉봉투에 쓰인 그녀의 이름을 보았을 게 틀림 없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줄곧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 환자의 진단서를 작성하고 나니 6시 10분이었다. 미도리마는 가운을 벗었다. 구두를 갈아 신고, 외투를 걸쳤다. 그는 진료실 안을 휙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적당한 상태로 제자리에 있었다. 그 외의 뒷정리는 간호사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그는 네모난 가방을 손에 들고 고개를 까딱하기만 하면 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금요일 밤이었다. 공기가 들떠있었다. 거리로 나서자 찬바람이 옷깃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내일쯤 목도리를 꺼내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올해는 유독 겨울이 성급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빠르고 변덕스럽게.


 세월이 흐르면서 키세는 악의 없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가령 예를 들면, 지금 창가 자리에서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남자. 그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 십 분마다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로비로 걸어나갔다. 가끔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어디야? 얼마나 더 걸려?'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냥 뚜벅뚜벅 호텔 정문으로 향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자리를 떠날 때마다 그는 테이블 위에 검은 지갑을 부주의하게 남겨 놓았다. 늦은 시각이었다. 호텔 로비에는 두세 명의 손님만이 흩어져 있었다. 문간에서 품에 메뉴판을 끌어안고 있는 웨이터가 서 있었다. 바텐더는 키세가 주문한 까다로운 칵테일을 만들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다른 직원들이 없었다. 

 키세로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 지갑을 자켓 안 주머니에 넣는 데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 지갑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예정되지 않은 시간에 예정되지 않은 장소에 가져다두면 그만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호텔을 나가서 오 분만 걸으면 23층짜리 빌딩이 하나 있었다. 층층마다 사무실이 가득한 건물이었다. 그곳의 로비에 걸어 들어가서 슬며시 지갑을 내려놓고 나올 수도 있었다. 

 로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키세는 머릿속의 노트를 펼쳤다. 그는 그 위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적어 내려갔다. 에이전시로부터 소개받은 디자이너와 함께 그는 모델 일을 계속했다. 예전만큼 일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원했던 대로 국립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이 년째 되던 해에 자신이 학위를 원하는지 잘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배우는 것은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늘 낯선 사람들 틈에서 웃고 있었다. 그는 많은 사진을 찍었다. 집 앞의 다리에서 바라본 하늘은 회칠한 벽처럼 창백하고 평평했다. 해가 질 때는 강과 산이 불타듯이 빨갛게 변했다. 에이전시를 통해 중간에 서너 번 일본에 돌아오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연락은 하지 않았다. 그는 몇 장의 편지를 썼고 그것들을 서랍 속에 처박아두었다가 연말에 한꺼번에 불에 태워버렸다. 뒤뜰의 나무에 새싹이 돋았을 때, 나뭇잎의 색이 점점 옅어질 때, 뼈만 남은 가지에 눈이 쌓였을 때, 토론하는 소리로 왁자지껄한 박물관에서 불현듯 텅 빈 회랑을 돌아보았을 때, 눈가에서 못 보던 주름을 발견했을 때, 백화점 벽에 걸린 어느 모델의 허벅지를 볼 때, 미도리마가 결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늙은 교수의 눈동자 속에 깃든 그림자를 보았을 때, 먼지 쌓인 제라늄 화분 위에서 얼어 죽은 새를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이 엉뚱한 장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자주, 그는 호텔 탁자 위에 남겨두고 온 종이 쪽지를 생각했다. 그 날 아침 미도리마가 그 쪽지를 지갑 안에 접어 넣었을까? 키세가 떠나고 일주일 후에 키세의 스타일리스트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곳에 가서 머리를 잘랐을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만족스러워했을지도 모르고, 아예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전히 그 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를 자를 지도 모른다. 

 그는 그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옳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 호텔에 있었다. 아직 7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많은 술을 마셨다. 최악의 경우에는 미도리마가 부인과 함께 나타날지도 몰랐다. 아니다, 키세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끔찍한 것은 미도리마가 걸어 들어와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친구, 보고 싶었어.’

 그보다 더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 키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찡그린 게 다였다. 취하지 않았다. 미도리마가 혼자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감수할 몫이었다.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더 이상의 우연도, 변덕도, 속임수도 없었다.

 

 빈말이라도 간호사들이 퇴근 후의 계획을 묻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미도리마는 태연하게 둘러댈 말을 준비해놨다.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할거라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미치는 영향까지 막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속으로 대답하게 될 것이다. 동창을 만나러 갑니다. 옛날에 알던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

 '우리 집에 갈래요?' 

 키세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도 초조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 미도리마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뒤늦게 서랍 속의 편지를 내버렸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래, 그게 내가 내렸던 선택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그것 역시 그가 내린 기꺼운 선택이었다.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호텔의 종업원은 그를 위해 식당 겸 술집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허리를 쭉 펴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 맞은편에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시계가 정확히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등 뒤에서 문이 마지막으로 끼워지는 벽돌처럼 달그락 소리를 내며 닫혔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미도리마가 틀림없었다. 키세는 술잔을 내려놓고 스툴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자 양복 차림에 코트를 걸친 미도리마가 서 있었다. 혼자였다. 키세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포옹을 해야 하나? 안녕? 미도리마라고 불러야 하나? 

 미도리마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

 키세는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그는 애써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알코올 탓인지 얼굴이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단단한 손은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관절이 두드러져 보였다. 인상은 조금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 키세는 거의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질 뻔했다. 새삼스럽게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였다. 그는 말했다. 

 “좋아 보이네요.”

 미도리마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키세는 뭐라고 말을 꺼냈지만 하나같이 두서가 없었고, 미도리마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위스키를 마셨다. 키세는 그가 그런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 귀국했지?”

 “일주일 전에요.”

 “프랑스는…”

 “좋았죠.” 키세는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번잡했어요.”

 “그랬군. 출국은 언제지?”

 바 안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렀다. 바텐더는 등을 돌리고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그들 외의 유일한 손님이었던 남자는 조금 전에 자리를 뜨고 말았다. 키세는 자신이 무언가 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할 말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 것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 안에는 빈 잔이 있었다. 미도리마의 잔에는 아직 술이 남아 있었다. 그 술이 떨어지면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그는 갑자기 생각했다. 삼 년 전, 이 호텔 어딘가에서 그들은 빈 잔을 바라보았다. 그는 쪽지를 남겼고. 결국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다시는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안 나가요.” 

 키세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거칠게 들리는 것에 놀랐다. 

 “아예 일본에 돌아온 겁니다.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 때 미도리마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다음 말을 누가 했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둘 중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남은 인생이 시작되었다. 




[창작] 희망

2013. 5. 15. 02:31

  M을 친 것은 평범한 트럭이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 파란 쇳덩이를 피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사람들 틈에 앉아있는 숀을 떠올렸다. 

 숀은 변호사였다. 날 때부터 잘 다려진 양복을 입고 태어난 듯한 사람이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키가 컸다. 그는 아무리 추운 날에도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맨손 체조를 했다. 그는 마른 수건에서 늘 라벤더 향기가 나기를 바랐고, 재판장 앞으로 걸어 나갈 때 구두의 번쩍거림과 뚜벅이는 소리가 검사들을 능가하기를 바랐다. 그가 재판에서 이기는 날마다 M은 파티를 열었다. 기자들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는 그의 미소를 찍어 앞다투어 지면에 실었다. 사람들은 그의 옷과 미소에 어울리는 수많은 구두들을 훔쳐보곤 했다. 금색 스티치가 앞 코를 가로지르는 구두, 얌전한 덮개가 발등을 덮는 구두, 볕에 그을린 말 엉덩이처럼 윤기나는 갈색의 구두들. 특별히 어려운 재판에 이긴 날에는 가장자리에 w모양의 장식이 들어간 아일랜드식 구두를 신었다. 완벽한 승리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사실 숀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몸매는 보기 좋았지만 조금 마른 축이었고 평생 달리기 말고는 할 줄 아는 운동이 없었다. 변호사는커녕 변변한 직업을 가진 적조차 없었다. 스물 서넛 무렵에 공장에서 우산에 스프링을 끼우는 일을 했지만 모아놓은 돈은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M은 종종 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 거리에 사는 누구라도 그의 파티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그는 다운타운에서 오랫동안 신발 가게를 했다. 선친이 물려준 유산에 8년간 회사원으로 일하며 모은 돈을 더해 차린 가게였다. 노란색 지붕을 인 삼 층짜리 건물이었다. 구매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그는 자신이 산 것이 건물의 형태를 한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는 건물의 1층을 당초 예정대로 남성용 구두 가게로 꾸몄고 2층과 3층은 자신이 생활할 공간으로 삼았다. 

 개업 파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네댓 명의 친한 친구들과 아직은 연이 끊기지 않았던 여동생이 함께 1 층과 2 층을 오가며 먹고 마셨다. 

 새벽 무렵 잠을 깼을 때 M은 2층의 소파에 누워 있었다. 집안은 지저분하고 어수선했다. 2층에는 부엌과 거실이 있었다. M은 길쭉한 식탁으로 두 공간을 구분해 두었다. 식탁을 지나면 아까 M이 누워있던 소파와 테이블,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사할 때 사용한 신문지와 상자들이 두서없이 흩어져 있었다. 창문으로 옅은 새벽빛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는 베일을 두른 미지의 여인처럼 희뿌연 안개에 감싸여 있었다. 빨간 입술 같은 아침 해가 저 멀리 구름 속에서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는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숙이 빨아들였다. 머리가 욱신거리며 서서히 술이 깼다. 

 그는 좁은 계단을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진열장을 한 켠으로 밀어놓은 1층에는 인사불성이 된 친구들이 여기저기에 잠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침실로 올라가 보았다. 3층은 천장이 낮았다. 단 하나뿐인 방에는 방과 거의 같은 크기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흰 시트가 한 점 구김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날은 아무도 그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3년 후 같은 날 그가 연 개업기념일 파티에는 못해도 서른 명의 이웃이 참석했다. 그는 한결같이 여동생에게도 초대장을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그녀는 이제 두 딸의 어머니였고, 그가 두 번째 애인-그녀의 표현대로라면 '남자 애인'-을 사귀기 시작한 후로 줄곧 연락이 되지 않았다. 새벽 한 시쯤 그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3층으로 올라갔다. 허벅지가 단단하고 턱수염이 근사한 애인이 그와 함께였다. 네 번째 애인이었다. 

 숀은 그의 다섯 번째 애인이었다. 그는 그냥 그의 가게로 걸어 들어왔다. 새벽 세 시였다. 1층에는 그의 친구들 몇 명이 LP판을 걸어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숀은 매일같이 그 집에 드나든 사람마냥 태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술에 취한 사람들을 휘 둘러보고 곧장 2층으로 올라왔다. M은 예의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느릿느릿한 댄스곡이 좁은 계단을 타고 숀을 따라 올라왔다. 숀은 옅은 물색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대학생들이나 신을 법한 옥스퍼드화를 신고 있었다. 소매는 살짝 접어 체크무늬 안감이 보이도록 했다. 그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스타일이었다. 그는 M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멋진 파티네요."

 "그런가요."

 M은 손에 맥주를 들고 있었지만 숀을 본 순간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졌다. 숀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맥주를 건네받았다. 어리고 섬세해보이는 손가락이었다. 스물 다섯? 스물 여섯? M은 이미 서른 줄을 훌쩍 넘겼다. 그는 조용히 숀을 돌려보낼 방법을 생각했다. 숀은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불쑥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M은 외로웠고, 숀은 전혀 위험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볶은 계란을 먹으며 서로의 배꼽을 간질였다. 1층으로 내려와서는 친구들이 어지럽히고 간 가게를 정돈하다가 춤을 췄다. 레코드의 지직거리는 소리에 맞춰 네 개의 발이 바닥을 긁으며 이리저리 곡선을 그렸다. 

 가게를 연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M이 가게를 보는 동안 숀은 다시 3 층으로 올라가 해질 무렵까지 잠을 잤다. 

 M은 장사를 해서 이문을 남기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제멋대로군요."

 숀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M은 천성적으로 물건을 팔 줄 알았다. 신발을 고르는 센스도 있었다. 그는 그가 파는 신발을 바로 그 사람이 꿈꾸던 신발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가게에 같은 신발을 수십 켤레씩 가져다 놓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이즈 별로 한두 켤레씩이었고 가게가 적당히 자리 잡은 후에는 그 구두를 살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미리 알아차리고 그 사람의 사이즈만 가져다 놓았다. 

 '이게 마음에 드네요.'

 지갑을 열며 이렇게 말했을 때 그가 점잖게 웃으며 '잘됐군요. 이게 마지막이에요.'라고 대답하면 손님들은 몹시 만족했다. 그것은 '인기가 많은 신발이에요.'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요.'라는 뜻이었다. 

 M은 팔아치운 신발의 수만큼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에게서 신발을 사고도 그의 친구가 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아침마다 자신의 애인과 함께 가게를 열었다. 신중하면서도 확실하게 주변에 자신을 드러내는 그의 방식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가게와 그의 거리에서 그는 자유로웠고 정직했다. 비록 온전한 자유는 아니었지만. 

 M은 숀을 위해 구두를 선물했다. 단 한 장의 가죽으로 만든 홀컷 스타일의 값비싼 신발이었다. 숀은 기뻐했지만 그가 정말로 좋아하는 신발은 구두가 아니라 운동화였다. 그가 운동화를 좋아하는 동안에는 상황이 좀 나았다. 그는 산책을 좋아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오후가 다 가도록 이곳 저곳을 쏘다녔다. 

 그는 M이 가본 적 없는 강가에까지 걸어갔다. M은 그가 사는 도시에 강이 있는 줄도 몰랐다. 

 "물이 아주 차가워요."

 숀은 송어와 이끼 낀 징검다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낚시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되지 않았다. 

 어느 노부인이 사는 집의 정원에서 장미를 얻어온 일도 있었다. 그 노부인은 숀이 독신이라는 말을 듣고는 장미를 선물해줬다. '어서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며. 숀은 그 일을 재미있는 에피솓드로 여겼다. M은 그렇지 않았다. 숀은 너무 멀리까지 걸어갔다. 숀이 만날 '좋은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노부인은 그 자리에서 충격으로 쓰러졌을 지도 몰랐다. 

 걱정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날도 숀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어느 주택가에 도착했다. 그림 같은 집들이 양 옆으로 늘어선 거리였다. 자전거를 탄 아이 두 명이 숀의 곁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저 멀리 자동판매기 앞에서 허리에 손을 얹은 남자 몇몇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갈색 개가 외따로 떨어진 물음표처럼 앉아 햇빛을 쬐고 있었다. 숀은 한 눈에 그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전면이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이층집, 바짝 깎은 잔디밭 위에 펼쳐진 우산 모양의 물줄기,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하나같이 그의 상쾌한 기분에 어울렸다. 

 그 날 숀은 허벅지 위로 성큼 올라오는 반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물병을 차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는 성인 남성이 그런 옷을 입는 일이 없었다. 사실 여자들도 그렇게 짧은 옷을 입지 않던 시절이었다. 숀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귀 아래까지 길러 밝게 탈색한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걸은 탓에 그의 콧잔등에 땀이 맺혀 있었다. 숨이 찼다. 마침 근처에서 벤치가 있었다. 숀은 그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근처에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보기 좋게 탄 종아리들이 경쾌하게 팔랑거렸다. 오분 정도 숀은 멍하게 풍경과 햇빛을 즐기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갈증을 느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빌어먹게, 왜 거기서 목이 말랐을까요?' 오후 두 시의 햇볕이 너무 따가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너무 먼 거리를 걸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닿는 길 건너편에서 아이들이 레모네이드를 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목이 말랐다. 그는 허리춤에 찬 러닝용 벨트에서 물병을 끌러내려 했다. 하지만 후크가 고장 났는지 물병이 잘 빠지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벨트를 앞으로 돌리고는 후크를 만지작거렸다.

 손에 긴 막대기를 들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던 한 여자아이가 숀을 발견했다. 

 "뭐 하세요?"

 아이가 물었다. 아이는 숀이 물병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다. 무척이나 열심히. 숀은 고마운 마음에 함께 후크를 잡아당기고 또 밀어보았다. 풀리지 않는 고리에 열중한 아이가 허리를 숙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 거리의 사람들이 숀을 바라보고 있었다. 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황한 그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이가 동그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판기 근처에 서 있던 남자들이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삿대질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 여자가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고 남자들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남자들은 숀의 어깨를 밀치고 얼굴을 몇 대 때렸다. 

 주민들은 분개해서 소리쳤다.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구요!"

 숀은 바지를 내린 적이 없었다. 다행히 경찰들은 주민들의 반응이 과했다고 생각했다. M은 굳이 그들에게 둘의 사이를 알리지 않았다. 

 "형 되시는 분도 잘 알겠지만 요즘 이 근처에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서요. 이해하세요. 그리고 동생분도 좀 점잖은 옷차림을 하는 게 좋으시겠습니다. 머리도 좀 자르시고요. 그리고..." 

 중년의 경찰이 M에게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말을 마치고는 딱하다는 듯이 M의 어깨를 두드렸다. M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숀을 데리고 경찰서 밖으로 나오자 문 밖에 서 있던 몇몇 남자들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숀은 결국 아무에게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 뒤로 숀의 운동화는 벽장 속에 쳐박혔다. 

 "원래대로 돌아온 거에요. 걱정 마세요."

 그는 침대에 모로 누워 중얼거렸다. 칩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씩 가게에 내려와 넋 나간 얼굴로 M이 구두를 파는 것을 지켜보았다. 손님들은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도 못하고 힐끔거리기만 하다 빈 손으로 가게를 나서기 일쑤였다. 경기가 좋지 않았다. M은 숀은 탓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M은 여전히 자주 파티를 열었다. 그 편이 오히려 숀의 무기력증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두 진열장을 밀어놓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들락거렸다. M은 샴페인의 향기, 비스킷 조각 위의 체리, 차가운 맥주, 부드러운 칼로 거대한 치즈를 자르는 감촉, 옷소매에서 풍기는 파우더 향기, 웅성거리는 말소리,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거리의 먼지 같은 것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소란 속에 숀이 있었다. M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종종 숀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사람들 틈에 앉아서 우연히 그 자리에 걸어 들어온 듯, 혹은 곧 걸어나갈 듯한 얼굴로 줄곧 M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처음 그런 숀을 발견했을 때 M은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거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러면 숀은 겨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냥 시선을 피해버리게 되었다. 

 숀은 울었다. 몇 번인가 파티를 열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했다. M은 물론 숀을 위해서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파티는 그가 가게를 운영하는 세일즈 수단이기도 했다. 많은 고객들이 그가 여는 파티를 기다렸다. 그들은 그 곳에서 연대를 느꼈다. 단지 숀 한 사람의 감정만을 위해서 그 모든 이득과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주 싸웠다. M이 숀에게 '뭐든 좋으니까 일을 해보는건 어때?'라는 말을 꺼냈을 때는 정말 끔찍했다. 숀은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렇게 나를 가르치려고 들지 말아요. 나보다 더 세상을 잘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구요." 

 M은 그를 가르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숀은 듣지 않았다. 그는 울며 말했다. 

 "알아요? 내가 열 살 때 우리 집 앞에 신문을 파는 사람들이 왔었어요. 그 사람들이 공짜로 솜사탕을 나눠줬죠."

 M은 그 솜사탕 이야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숀은 술만 마시면 그 이야기를 꺼냈다. 딱 하루, M이 일 때문에 도시를 떠나 있던 날에도 그는 새벽 두 시에 전화를 걸어서 해가 뜰 때까지 그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당신은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셈이죠? 나를 혼자 여기에 남겨놓고...'

 그 때 M의 내면에는 수화기를 붙든 채로 잠이 들 때까지 숀을 기다려 줄 사랑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받으려고 길에 서 있었어요. 우리 동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서 있었죠. 그 신문 판매원들은 바보예요. 그런 거리에 신문을 정기 구독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명 두 명, 솜사탕을 쥔 아이들이 줄 앞에서 튀어나왔어요. 어떤 여자애가 분홍색 솜사탕을 주물럭거리면서 내 옆을 지나갔죠. 정말 달콤해 보였어요.

 그 때 어떤 남자가 길 옆에 있는 창문 없는 건물에서 굴러, 아니, 튀어나왔어요. 그러더니 침을 튀기면서 큰 소리로 욕을 해댔죠. 그 남자가 걷어찬 쓰레기통이 내 옆으로 굴러왔어요. 나는 쓰레기통을 봤고, 출렁거리는 배를 보았고,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았어요. 다음 순간 그가 줄에서 나를 끌어내고 뺨을 때렸죠. 나는 무섭고 아파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거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어요. 무서워서가 아니었죠. 솜사탕 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어요. 한 번 줄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요. 남자는 분이 풀릴 때까지 나를 때렸어요. 중간에 내가 쓰러지자 머리채를 잡고 다시 일으켜서 벽에 기대어놓고 때렸어요. 일이 끝나고 나서 그는 깊이 한숨을 쉬었어요. 그 모든 게 내 탓이라는 듯이. 숨에서 정말 역겨운 냄새가 났어요. 나는 거의 토할 뻔했지만 참았어요. 그랬다간 다시 맞을 것 같았으니까요. 다행히 나는 토하지 않았고 그는 내 바지 주머니에 동전 몇 개를 쑤셔 넣고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어른한테서 돈을 받은 건 그게 처음이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용돈을 주지 않았거든요. 나는 비틀거리면서 줄 맨 끝에 가서 섰어요. 원래 서 있던 자리에 가서 서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나를 끼워주지 않았죠. 하지만 내가 솜사탕 기계 근처에 가기도 전에 설탕이 다 떨어지고 말았어요. 사람들은 흩어졌고 트럭은 떠났어요. 끈적거리는 나무 막대만 바닥에 굴러다녔죠. 나는 손에 동전을 쥐고 있었는데 아무데도 쓸모가 없었어요. 이래도 내가 돈을 벌어야 돼요? 나는 돈 같은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안다구요. 줄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 당신이 밤마다 불러서 술을 퍼주는 남자들도, 당신이 여는 파티에 오는 남자들은 모두 창녀고 여자들은 전부 원숭이를 구경하러 동물원에 들어오는 술취한 화냥년들이예요. 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수군거리는 지 모르죠? 그들에게 당신은 고상한 척 하는 호모 포주예요. 내가 돈을 벌지 않는 게 문제라면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죠? 이제 와서 사랑이 식으니 나를 내쫓으려는 구실로..."

 그는 숀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단지 말없이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리거나, 끌어안아주는 것으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소리쳤다. 

 "아냐, 숀, 그게 아니야. 돈을 벌어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모르겠어? 빌어먹을!" 

 숀은 입을 다물었다. M은 벌써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과의 말을 꺼내려 했지만 숀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리고는 그날 밤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M은 머리를 싸매고 그가 밤을 지낼만한 곳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랬듯이 그냥 아무 집으로나 걸어 들어가서 봉변을 당하거나 또 잡혀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염려는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갈 곳 없는 사람을 내쫓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그는 2층 소파에 앉아 꼬박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M은 오히려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평소보다 일찍 가게 문을 올렸다. 이제 그만 숀을 내보낼 때가 되었다. 이전 애인 중에도 숀만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은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너무 과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숀에게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말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숀도 지금쯤 머리가 식었을 테고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날 밤에도 3층 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숀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좁은 계단을 지나 그가 2층으로 걸어 들어올 때 M은 소파 앞에 앉아 있었다. 숀은 말없이 걸어와 M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M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어린애처럼 뜨끈한 정수리에서는 시큼한 술 냄새와 담배 찌든 내가 났다. M은 졸린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아직은 그를 보낼 때가 아닐지도 몰라.'  

 그 뒤는 형편없었다. 그들은 난파된 배의 선원처럼 바닥에 말라붙은 M의 동정심과 빵 부스러기 같은 사랑을 갉아먹으며 버텼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멀리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누군가가 평등과 자유를 얻기 위한 퍼레이드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M은 그저 파티를 열었다. 사람들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만. 그럼에도 차양을 내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다락방에 처박혀 있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총을 맞거나 얼굴을 가린 시민들에게 가게를 털리고 싶지도 않았다.  

 매일 아침이 오면 M은 가게 바닥의 어수선한 발자국들을 대걸레로 문질러 닦으며 숀과 헤어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2층으로 올라가고, 거기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노을에 젖은 얼굴을 마주하면 어느덧 그런 확신은 새벽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M이 숀에게 선물한 구두는 수십 켤레로 늘어났다. 숀은 그것들을 늘어놓고 짝도 맞추지 않고 발을 넣어보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놓곤 했다. 침대 위에는 변함없이 흰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숀은 그 위에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누웠다. 그 주위로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같은 발 사이즈의 자살자 수십 명이 침대 속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춘 듯했다. 

 숀은 전화를 걸어 M에게 그 풍경을 설명했다. 

 "이걸 다 어쩌라는 거예요?"

 그는 구두 한 짝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숀은 날카롭고 무감정하게 깔깔거렸다. M은 그 소리를 따라 힘없이 미소 지었다. 

 "언제 돌아올 거예요?"

 집을 나선 지 겨우 두 시간이었다. M은 그날 저녁 파티에 쓸 고기 꾸러미를 안고 있었다. 

 "곧 돌아갈게." 

 전화는 인사도 없이 끊겼다. M은 세탁소와 서점에 들렀다. 도중에 비가 내렸고 덕분에 고기를 싼 종이가 조금 찢어졌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그는 비에 젖은 흰색 팬지 꽃이 눈부신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정류장 옆의 가판대에 주인이 나와 신문을 감쌌던 비닐을 벗겼다. 습기로 쭈글쭈글해진 신문에는 퍼레이드를 덮친 총격 사건이 대서특필 되어 있었다. 

 M은 가판대 옆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너덜너덜한 전화번호부를 뒤져 도시 끄트머리에 있는 호텔을 찾아냈다. 그는 알렉스 버칼로우라는 이름으로 방을 예약했다. 지금 막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호텔 접수원에게 철자를 불러주며 부스 안을 둘러보았다. 격자모양의 유리창에는 외설적인 말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누가 적었는지는 몰라도 수화기에 대고는 그 말들을 내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화를 끊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곧장 호텔로 갔다. 방은 깨끗했다. 그는 방을 둘러볼 생각도 않고 옅은 보라색 침대 커버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다음날 저녁까지 깊은 잠을 잤다. 

 그 날 밤에 몇 명의 친구들이 M의 집을 찾아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후에 전해 듣기로 첫 손님이 가게의 문을 두드렸을 때 가게는 손님을 맞이하려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다. 숀은 M의 친구 몇몇의 도움을 받아 가게의 진열장과 낮은 의자들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처음에 그는 침착했다.  

 "고기를 사러 나갔어요. 곧 올 거예요."

 하지만 한 시간, 두 시간이 흐르고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게 1층을 서성거리게 될 때까지도 M은 돌아오지 않았다. 숀은 십여 번이나 1층부터 3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더니 그대로 집을 나갔다. 이웃들은 정육점과 식료품점과 주차장과 세탁소를 왔다갔다하며 M을 찾는 숀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 중 누군가는 숀이 공중전화 박스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다이얼을 돌려대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숀이 몇 시에 집에 되돌아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가게를 비워두고 가기가 염려되어 떠나지 못하고 있던 마지막 사람이 가게를 나섰을 때가 11시였다. 

 M은 다음날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멀리서 바라본 건물은 모든 창문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가게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진열장도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당황한 사람들의 발에 채인 구두가 몇 켤레 굴러다녔다. '프리처 다녀감'이라고 쓰인 쪽지도 있었다. 안테나가 축 쳐진 라디오에서는 음악 대신 지직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M은 화가 났다. 그는 일부러 곧장 위로 올라가지 않고 1층을 정돈했다. 라디오를 끄고, 신발을 다시 진열하고, 손자국이 남은 유리창도 닦았다. 그 동안 인기척은 없었다. 이제 화는 사라지고 두려운 마음만이 남았다. 

 불현듯 M은 숀이 영영 집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왔을 때처럼 말없이 떠나주기로 한 것이다. M은 자신이 얼마나 비열한 행동을 했는지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손이 떨리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불쌍한."

 숀. 그는 좁은 통로 벽을 손으로 집으며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에는 십여 개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대부분 그의 가게와 연관된 사진들이었다. 처음 가게를 연 날의 사진도 있었고 그가 판 멋진 구두를 신고 있는 손님들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먼 옛날 여동생이 보내온, 배냇저고리를 입은 조카들의 사진도 작은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2층에는 한 눈에도 숀이 없었다. 그는 전화선이 뽑힌 전화기와 포도주가 쏟아져 있는 테이블을 보았다. 구겨진 신문 옆으로 담배 꽁초가 수북한 깡통 뚜껑도 보였다. 숀은 그의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도 뭔가 노력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마찬가지로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원래는 옛 애인들의 사진이 있었으나 숀이 모두 떼어버리고 두 사람의 사진으로 바꿔 걸었다. 첫 번째는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창가에 서 있는 M을 찍은 사진이었다. M은 그 사진을 찍어줄 때 숀의 얼굴과 옷차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나른하고도 진지한 태도로 카메라에 눈을 가져다 대고 천천히 셔터를 눌렀다. 셔터를 누르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 순간의 M을 움켜쥐는 듯 했다. 

 두 번째 액자부터는 사진 속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안녕 당신은 정말 

 M은 잠시 넋이 나갔다. 보이지 않는 손이 관자놀이에 긴 못을 박아 넣는 듯 했다. 공중전화 부스에 휘갈겨 있던 글씨들이 불현듯 눈 앞을 가로막았다. 

 '죽어버려, 헐렁한 년' 

 계단 중간쯤에 또 다른 포스트잇이 있었다. 

 -제멋대로야 지난 밤은

 -아주 멋진 파티였어.

 마지막 메시지는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이제 이 신발이 내게 어울리는 말해줘.

 M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계단을 올랐다. 3층에는 방이 단 하나뿐이었고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 하나만이 꽉 차게 들어서 있었다. 침대 주위에는 주인 없는 신발들이 야단스럽게 밑창을 내보이고 있었다. M이 사랑하는 노란 지붕을 지탱하는 굵은 대들보가 낮은 천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숀이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M은 정신 없이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며 그 구두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숀이 신고 있는 구두를 잘 알고 있었다. 

 자르지 않은 하나의 가죽으로 만든. 절개선이 없는 구두. 아주 비싼. 

 그 날은 아무도 그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M은 건물을 팔거나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싱글 사이즈의 침대를 사서 2층 한구석에 들여놓았다. 3층은 창고로 사용했다. 손님들이 '이 구두로 할게요.'라고 말하면 그는 3층으로 올라가 수많은 구두들 사이에서 손님에게 맞는 신발을 들고 내려왔다. 가끔은 사이즈가 없어서 도매업자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M의 건물은 파티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가 되었다. 장례식이 그의 마지막 파티가 되었다. 

 그는 몇 년 만에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세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아이들이 부드럽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여동생의 규칙적이고 따뜻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M은 밤을 새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산책을 다녔다. 멋대로 길어지도록 내버려둔 머리가 밤바람에 휘날렸다. 가끔은 경찰들이 이유도 없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들은 금세 M을 보내주었지만 '아시겠지만'으로 말을 시작하지 않았고 별다른 사과나 인사도 하지 않았다. 먼 도시에서는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거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안개와 달빛에 올라타 멀리 숲으로, 환락가로, 교회로, 강으로, 도로변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날이 밝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귀가 시간은 점점 더 늦어졌다. 

 그는 가장 좋은 신발을 신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까지 갔다. 넓은 계단이 있는 야외 극장을 지나갈 때 수풀 속에서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두 남자는 멀찍이서 그를 따라왔다. M은 두렵지 않았다. M은 그들이 뚜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차가 없는 도로를 가로질렀다. 해가 뜨기 직전의 간질간질한 공기가 그의 폐 깊은 곳을 간질였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집에 걸어들어온 숀을 생각했고,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를 따라 걷고 있었던 두 남자가 그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쳤다. M은 눈을 떴다. 남자들이 손으로 나팔모양을 만들어 입 앞에 대고 있었다. M은 그들 틈에 앉아 있는 숀을 보았다. 

 그 때 트럭이 그대로 그를 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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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의 자살장면은 영화 'milk'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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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황청황] I'll be there with you

부상 소재 주의


 오후 두 시에 촬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이불 속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가 침대 머리맡에 인스턴트 도시락을 가져다주며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상관 없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술 냄새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오미넷치,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요."

 그는 계속 그렇게 말한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만 두든지."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아직 옅은 화장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투덜거린다.  

 "화장 지우고 오라고 했잖아. 기분 나쁘다고."

 내가 거실의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동안 그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화장실, 침실, 드레스룸, 마지막으로 베란다 유리문 앞에 서 있다가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베란다에 쌓아놓은 술병들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손에 침실 쓰레기통이 들려 있었다. 옅은 파란색이었고 안에는 뚜껑도 열지 않은 도시락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찌푸린 얼굴에 설핏 웃음이 스쳤다.

 "오늘도 헛소리 잘 하네요."

 그는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을 내려놓았다. 플라스틱 모서리가 바닥과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집안일을 봐줄 사람을 따로 두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이라고 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쓰레기통에 들어있는 도시락, 쌓여있는 술병 같은 것을 보면서 고용주의 건강상태를 걱정할지도 모른다. 걱정은 소문이 되고 소문은 추문이 되어 젊은 모델에게 치명적인 오점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때도 그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생각들에 염증이 났다. 키세는 나보다 먼저 농구를 그만두었다. 그 때 그가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하다못해 얼굴 표정 하나라도 생각이 날 법 한데, 신기하리만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농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프로 농구팀에 처음으로 입단했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떠왔다. 내게 잔을 건넸지만 마시지 않았다. 대신 그가 머리맡에 앉을 수 있도록 몸을 비틀어주었다. 그가 내 머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얹었다. 목덜미에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그는 물을 마시면서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점은 없었다. 날씨가 어땠다거나, 같이 일하는 누가 아이를 낳았다거나, 집 앞에 새 가게가 생겼다거나 하는 종류의 얘기였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팔을 이마 위에 얹고는 몸을 옆으로 뒤척였다. 입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내 손을 잡아 내리고는 자신의 손으로 내 눈을 덮었다. 따끈한 손바닥이 눈두덩이를 가만히 눌렀다. 그가 내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대었다. 나는 얌전히 그 물을 받아마셨다. 물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 몸 속에 파란 불이 밝혀지는 듯 했다. 그는 소파 옆 탁자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내 입술에 키스했다. 손가락이 목덜미 옆을 파고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내가 말했다.

 "그래,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버저가 울렸을 때 내가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환호성이 체육관 천장을 향해 솟아올랐다. 동료들은 모두 코트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악의에 가득찬 손이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 듯 했다. 무릎이 뻣뻣했다.

 코트 저편에서 누군가가 농구공을 들고 있었다. 그 공이 자석처럼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나는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사람처럼 허리와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다. 눈동자만 겨우 굴려 멀리 관중석을 뒤졌다. 군중 속에 사츠키가 있었다. 그녀는 내 상태를 알아차린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고 그 옆에 키세가 서 있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매번 잡지며 화보집을 보내오는 통에 잊을래야 잊기도 힘든 얼굴이었다. 오늘 경기를 보러 오겠다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 전까지는 거기 있는 줄도 몰랐는데. 사츠키가 키세의 팔을 잡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사츠키, 자켓이 구겨지잖아. 저 놈 입은 거 비쌀텐데.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키세가 계단을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통증이 너무 심했다. 농구공은 이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남아있는 회전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구르다가 멈출 것이다.

 팀원들이 내 어깨 밑에 팔을 쑤셔넣었다. 겨드랑이 아래에 자갈돌이 맺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후에 들었지만 그 때 키세가 코트까지 뛰어나와 있었다고 했다. 그 때는 보지 못했다. 환호성은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어딘가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코트 위로 쓰러졌다.

 기절하지는 않았다. 오륙 년 전부터 숱하게 들락거리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 경기가 내 마지막 경기였다.

 처음 육 개월 정도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수술을 하고 재활훈련을 하는 동안 플레이오프가 끝났다. 가족 외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지만 키세와 사츠키만은 고집을 부려 병원이며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언제 면허를 땄는지 몰라도 키세에게는 차가 있었다. 퇴원 후에는 그 차를 타고 병원에 가는 일이 잦았다. 키세가 오지 않을 때는 보통 전철을 탔다.

 초여름 어느 날 키세 없이 병원에 가던 길이었다. 밤새 비가 와서 시야가 넓고 환했다. 습기를 머금은 보도블록 위로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선한 바람이 흰 구름을 둥그렇게 부풀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바닥에 깔린 그림자 위를 천천히 걸었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었는지 한 무리의 중학생들이 우르르 길을 건너는 것이 보였다. 감색 블레이저가 묘하게 눈에 익었다. 언젠가 경기장에서 마주친 옷일지도 몰랐다. 횡단 보도 앞에 택시가 서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 뒷좌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요?'

 기사가 미터기를 켰다. 나는 아무 곳이나 생각나는 역 이름을 댔다. 이름만 들어보고 한 번도 찾아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창 밖으로 똑같은 옷을 입은 앳된 얼굴들이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택시에서 내려서 일찌감치 문을 연 술집을 찾아냈다. 병원 예약 시간이 십 분쯤 지났을 때 첫 잔이 나왔고 나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렸다. 밤 늦게 술집을 나서며 주인에게 가게의 오픈 시간을 물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후 네 시라고 대답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와서는 매일 하는 스트레칭도 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병원 진료를 빼먹은 첫 날이었다

 뭐 그런 식으로, 하나 하나.

 나는 매일 그 술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늘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대작 상대라고는 더러운 자국이 남아있는 벽 뿐이었다. 술집은 적당히 어둑어둑하고 소란스러웠다. 일곱 시가 넘으면 바 자리가 꽉 찼고 다른 테이블에도 슬슬 손님이 들어앉았다. 금요일 밤에는 머리 색이 요란한 애송이들이 친구들을 몰고 와 밤 늦도록 가게를 가득 채웠다. 내가 그 틈에 끼게 되는 일은 없었다. 가게 주인이 '당신 자리'라고 부르기 시작한 구석 자리는 묘한 사각 지대에 있었다. 처음 가게에 들어왔을 때 일부러 그런 곳을 찾지 않았다면 나도 그 자리의 존재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키세의 경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냥 어느 날 그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술을 마시고 있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주스나 다름 없는 맥주를 시켰다. 나는 그를 비웃었지만 되려 한심하다는 시선만 돌려받았다. 그는 시간을 들여 맥주 한 잔을 아주 천천히 마셨다.

 그가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는지 생각하는 것은 금세 그만두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내가 있는 곳을 찾는 데는 귀신 같은 재능이 있었다. 왜 여기에 찾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나았지만 뻔했다. 사츠키나 어머니가 보냈겠지. 왜 병원에 가지 않느냐 혹은 기운을 내라는 둥의 말을 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깨달은 거지만 키세는 한번도 내게 힘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앞에 빈 술병이 쌓이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결국 테이블 위에 엎어졌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더 마실래요?"

 바로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비칠비칠 고개를 들자 어두운 오렌지색 조명을 등지고 선 그가 보였다. 한 손을 바로 내 팔꿈치 옆에 짚고 오른손에는 영수증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멀끔해 문득 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허탈한 감정이 금세 그 뒤를 따랐다.

 "안 마실 거면 가죠. 데려다 줄게요."

 그가 나를 부축했다. 안 그래도 다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의지해서 술집을 빠져나왔다. 땀 냄새와 술 냄새, 담배 냄새, 벽 어딘가를 좀 먹고 있는 게 틀림없는 곰팡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잘도 이런 데서 술을 마셨네요."

 그는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집까지 차를 몰았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취기가 모두 달아나 있었다. 그는 차를 세우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내가 '고맙다'거나 '그럼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차례였다. 나는 앞 유리창을 통해 집 앞 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생일 적 이후로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었다. 눈 감고도 집 앞 골목길 구석구석을 그릴 수 있었다. 옆 집 담벼락 너머로 삐져나온 단풍나무 가지며 전봇대에 기대듯 놓인 쓰레기봉투 같은 것들 하나하나에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기억이 서려 있었다. 몇 번이나 농구공을 들고 공원을 향해, 학교를 향해 이 골목을 빠져나갔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한 손으로 공을 들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옆구리에 끼거나 한 손 위에 올린 채 걷기 시작했고, 공을 튕기면서 뛰다가 차에 치일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일 년에 절반 이상은 늘 비슷비슷한 반바지 차림이었고, 농구화는 수시로 바뀌었다. 키와 함께 발 사이즈가 자주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농구를 좋아했다. 뻣뻣한 구멍에 단단한 운동화 끈의 끝을 밀어넣을 때의 느낌, 발뒤꿈치에 느껴지는 새 신발의 어색함은 물론이고 닳아빠지고 더러워진 신발의 나긋나긋함 역시도 모두 사랑했다.

 키세는 나를 재촉하지 않고 전조등을 껐다. 내가 아직 술에 취해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시각에 어울리지 않는 빛 속으로 내던져졌던 풍경이 순식간에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만치 앞에 가로등이 있었지만 주황색 불빛이 전구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가 화를 내듯이 깜박거리고 그러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할 뿐 제대로 빛을 내지 못했다.. 짧은 간격으로 가로등이 꺼졌다가 켜질 때마다 골목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는 듯했다. 그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얼굴을 돌렸다.

 내가 먼저 키세의 이름을 불렀고 다음 순간 내 손이 그의 목덜미를 감싸쥐고 있었다. 나는 키세에게 키스했다. 아니면 키세가 내게 키스했던지. 그 후로 그는 늘 내 곁에 있었다.

 

 사츠키와 어머니는 그 의사를 '일본 최고'라고 불렀다. 그에게 진찰을 받기 시작한 지도 벌써 여러 해였다. 그는 늘 최선을 다해 내 부상을 치료했고 나는 언제나 다시 코트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몇 시즌 후, 빠르면 몇 달 뒤에 다시 그를 찾았다. 패턴은 같았지만 몸은 늘 같은 식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90% 회복, 80% 회복, 50% 회복, 또 다시 70% 회복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찾아왔다.

 진찰실은 여느 때와같이 넓고 환했지만 그 날 그 순간만큼은 그 환한 빛이 지긋지긋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메모지, 차트, 뚜껑이 열린 펜 같은 것들이 두서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관절모형과 꽃병에 꽂혀있는 프리지아 몇 송이였다.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의사의 표정은 빌어먹도록 침착했다.

 한 손은 책상 위에 한 손은 무릎 위에 얹어둔 의사는 상체를 내 쪽으로 조금 기울이고 있었다. 프리지아가 반사해내는 노란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의사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꽃 향기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선생님, 전에도 몇 번이나 위험하다고 했지만 그 때마다 결국에는 재활에 성공했잖아. 이번에는 그럴 가능성은 없을까? 전에 한 달간 운동을 쉰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런 건 아닐까? 수술은? 물리치료는? 앞으로 최소 5년은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테이핑만 제대로 하면 한 시간 정도는 참을 만 한데. 우리 팀 닥터 말로는...

 내가 이런 말을 쏟아내는 동안 의사는 잠자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감싼 흰 가운 위로 햇빛이 차르르 흘러내려 바닥과 책상 위를 구르고 내가 움켜쥐고 있는 바지 위로 뚝뚝 떨어져 무릎을 적셨다. 의사가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진정하세요."

 진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냉정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 결국에는 진정하는 날이 오기는 올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말했다.

 "눈부셔요. 블라인드 좀 내려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를 내렸다. 진찰실 안으로 천천히 그림자가 기울었다. 의사는 잠시 창문 앞에서 미적거렸고 나는 꽃병과 함께 그림자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파에서 한 번, 침대에서 한 번. 사정 후에 나는 졸기 시작했다. 잠에서 깼을 때 키세는 옆에 없었다.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침대 시트를 더듬어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곧 문간에 키세가 나타났다. 한 손에 잘 빠진 유리잔을 들고 있었다.

 "술 먹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뒤적여 속옷을 찾아 입었다. 키세는 이미 바지까지 걸치고 있었다.

 "덕분에 온 집에 술 냄새가 진동해서요."

 사실 집에 진동하는 것이 그것만이 아니었다. 콧구멍 속에, 목구멍 속에, 관절 마디마디 속에 구역질 냄새가 함께 맴돌았다. 나는 그것이 패배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키세가 침대 발치로 다가왔다.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는 내 발목을 감싸쥐고는 신중하게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몇 번 그 동작을 반복하고 다음에는 종아리와 발뒤꿈치를 문질렀다. 반질반질한 머리통이 말없이 열중해 있는 것을 지켜보다가 바닥에서 술잔을 집어들었다. 다소 무리한 자세라 거의 잔을 쓰러트릴 뻔했다. 키세는 내 손에서 잔을 빼앗으려 했지만 적극적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나 같은 종류의 환자에게 키세는 그다지 좋은 보호자가 아니었다.

 유리잔에는 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달라붙어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 안에 털어넣었다. 키세는 바닥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물었다.

 "그건 뭣 하러 매일 하냐?"

 "뭐요?"

 "이거."

 나는 종아리를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글쎄. ...무릎 구부리지 마요."

 키세가 내 발목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섰다. 밝은 불빛 아래서 보이는 상반신이 다소 마른 듯 했다.

 "너도 요즘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그걸 이제 알았어요?"

 "더 마시자."

 "나 오기 전에 혼자 엄청 마셨잖아."

 뱃속이 끓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더 마셔야겠어."

 키세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나를 말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만약 고개를 젓는다면 그건 정말 그만 마셔야 할 때라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그 신호를 무시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 때마다 실랑이는 몸싸움으로 번졌다. 그것은 개운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한 일이었다. 섹스를 하든 싸움을 하든 그와 뒹굴 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두 명의 낙오병들이 있다. 키세한테 말하면 분명 기도 안차다는 듯 웃어버릴 테지만.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기분이 나빠."

 "늘 그랬잖아요."

 키세는 언제나 가볍게 말을 뱉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 의도가 그렇지 않을 때조차도, 어조나 말투가 모든 일을 허투루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나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끈기가 있었다. 부모님이 나를 키세의 집에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농구를 그만둔 뒤로' 늘 그랬다.

 "재밌냐?"

 "뭐가요?"

 "모델 일."

 "별 실없는 소리를 다하네요. 그럭저럭?"

 "농구만큼?"

 키세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웃었다.

 

 딱 한 번 그가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무렵이었다. 아침에 매니저가 우리 집까지 차를 끌고 와서 아예 함께 스튜디오로 향했다. 키세가 직접 이곳 저곳을 안내해준 시간이 십 분 정도였고 그 뒤로는 줄곧 스텝들 사이에서 촬영을 지켜보았다. 무슨 브랜드의 카탈로그 촬영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이름은 몰라도 옷이며 가방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디자인이었다. 내가 누군가가 가져다 준 의자에 앉아있는 동안 키세는 조명 아래에 서서 옷을 십 수 번이나 갈아입었다. 워낙 평소에도 표정이 다양한 녀석이라서 촬영하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는데도 막상 현장을 보니 사뭇 느낌이 달랐다.

 신호가 떨어지면 모두가 키세에게로 밀려들었다가 다음 신호와 함께 모두 조명 밖으로 빠져나갔다. 결국 키세 혼자 남아 서 있는 자리는 손가락에 딱 맞는 반지처럼 그에게 어울렸다. 하얀 조명에 목이 탔다. 근처에 서 있는 내게까지 열기가 느껴지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조차 맺히지 않았다.

 나는 왠지 부루퉁한 기분이 되었다.

 촬영이 끝나고 키세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지만 우리는 매니저를 졸라 근처 공원에 내렸다. 두 사람 모두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농구를 했다. 코트 바닥에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키세가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먼저 주저앉아버릴 수가 없었다. 키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일 정도로 무릎을 떨고 있었다.

 '나 촬영하는 거 어땠어요?'

  그가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하지만 얼굴 전체에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지겨웠어.'

 '에이, 솔직히 좀 멋있었으면서.'

 '진짜로.'

 나는 대충 공을 바닥에 튕겨 키세 쪽으로 보냈다.

 '이게 더 재미있어.'

 그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을 묘사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어쨌든 그는 웃었고 공을 옆구리에 끼고 내 쪽으로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이제 가요. 도와줄까요?'

 '내가 널 부축하는 거겠지.'

 희미한 가로등 빛과 달빛에 의지해 어두운 산책로를 걸어 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이따금씩 시비를 걸며 서로를 밀쳤다. 공원을 완전히 빠져나올 쯤에는 스튜디오에서의 찜찜한 기분은 땀에 씻겨 내려간 듯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 다음 날이 휴일이었는지 평일이었는지 하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골목길에서 헤어질 때 키세와 나 모두 다음 날 어딘가의 코트에서 당연스레 서로를 만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야마토는 내가 팀에 들어갔을 때 이미 몇 군데의 만성적인 부상을 달고 살았다. 한 때는 팀을 이끌던 선수였지만 한풀 꺾이다 못해 재계약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드디어 퇴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버텨냈다. 결정적이지는 않아도 늘 어떻게든 팀에 기여했고, 가끔은 그런 그의 끈기에 감탄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내 마지막 경기에서 끝까지 공을 쥐고 있던 사람이 바로 야마토였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매 경기마다 팀원들의 상태에 대해 전해 듣기는 해도 경기가 끝나면 대부분 잊어버리기 마련이었고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거의 없었다. 내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그는 자주 혼자 서 있었다. 그에 대한 내 평가는 단순했다. 좋은 사람. 하지만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그가 병문안을 온 것은 의외였다. 그는 팀원들의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화제는 금세 농구와 관련 없는 곳으로 튀어나갔다. 내 반응이 시큰둥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먼저 병원에 와 있던 키세 때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는 듯 했다. 키세는 특유의 친근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대화 덕분에 나는 키세가 이십 대 초반에 농구를 그만둔 뒤 그 후로 몇 년간 전공 공부에 열을 올렸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모델 일은 그만둔 적이 없었다. 공부는 즐거웠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지만 역시 모델 일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대학원에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야마토는 앞으로 이삼 년이 한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에 코치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보조 스텝이나 교사로 일하고 싶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화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하나같이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절뚝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야마토가 시선으로 내 움직임을 쫓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이 귓전에 들리는 듯 했다.

 '회복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복귀할 수 있을까?'

 나는 병실 한 켠의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등을 돌리고 서서 잔에 얼음을 채우고 노란 액체를 부었다. 뽀글뽀글한 기포가 잔 위로 올라왔다. 몸을 돌린 내가 들이키는 음료를 보고 야마토는 '어어..'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는 키세의 눈치와 내 눈치를 번갈아 보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키세는 나무라듯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냉장고에 기대어 불편한 다리를 의기양양하게 뻗치고 서서 음료를 모두 마셨다.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 야마토는 키세와 내 눈치를 보다가 곧 병실을 떠났다. 야마토가 나가고, 키세는 그대로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는 그의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았다. 야마토가 놓고 간 과일 바구니가 덩그러니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가 말했다.

 "왜 그랬어요? 저 사람이 돌아가서 무슨 말을 쑥덕거릴지 모르잖아요."

 "그러라고 마신거야."

 키세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시긴 뭘 마셔." 그가 물었다. "농구 다시 하기 싫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 키세는 그대로 등 뒤에 앉아 있었다. 나는 문을 잠그고 남은 주스를 변기에 버렸다. 그리고 세면대에 팔을 집고 서서 오랫동안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수술 이틀 전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나는 울었다. 슬프거나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 때문이었다. 목이 말랐지만 물이 마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마취가 깨면서 통제되지 못한 무의식이 입술 사이로 마구 새어나왔다. 부모님은 유리창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것은 간호사뿐이었다. 그녀는 분주하게 맡은 일을 수행 하고는 조금 귀찮다는 듯, 혹은 불쌍하다는 듯이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다른 병상으로 멀어졌다.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는 키세가 곁에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키세."

 목이 아팠다.

 "일어났어요?"

 키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펴볼 것처럼 책갈피에 손가락을 끼운 채였다.

 "책 읽을 정신이 있냐? 아파 죽겠구만."

 "수술한 건 아오미넷치지 내가 아니잖아요."

 키세가 재깍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책 사이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이제 진짜 정신이 드나 봐요? 아까도 몇 번 이름 불렀다가 도로 자던데."

 "목 말라."

 "? 없는데. 줘도 되나? 사람 불러올게 기다려봐요."

 키세는 물병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나는 링거가 꽂혀있지 않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눈물이 마른 자리가 뻣뻣했다. 나는 살을 쥐어 뜯어 손톱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했던 키세의 손을 떠올렸다. 병실의 천장은 높았고 마음이 차분했다. 왠지 수술 경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농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른 아침 코트에는 인적이 없었다. 준비에만 한참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테이핑을 하고 근육을 풀었다. 묵직한 공이 손바닥에 닿는 느낌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낯설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몸을 움직여 볼 작정이었다. 집에는 돌아가야 했기에 키세에게 문자를 보내두었다.

 '공원에 있음.' 답은 없었다. 하지만 늦어도 두세 시간 후에는 이곳으로 올 게 틀림없었다.

 공을 튕기기 시작하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은은한 진동이 느껴졌다. 뱃속에서 락 콘서트가 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흥분했다. 내 몸이 찰흙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 세상에 딱 맞게 변화했다. 튀어나온 부분은 들어가고, 자라나야 할 부분이 자라났다. 세상 역시 내 몸에 맞춰 변하기 시작했다. 코트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은 내가 농구를 시작할 때부터 바닥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 같았고, 온 세상이 나를 향해 기울어지고 서로 얽혀 거대한 돔을 형성하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새파란 하늘 위로 햇빛처럼 축복이 쏟아졌다. 내가 공을 튕기는 자리마다 지면이 한 뼘씩 뛰어 올랐다. 단지 센터와 골대를 느릿느릿 오갈 뿐인데도 시간이 날듯이 지나갔다. 다리와 허리가 저려오기 시작하고도 나는 한참이나 더 공을 튕겼다.

 그러나 나는 끝내 의지와 상관없이 멈춰서야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가슴까지 들썩거렸다. 어느새 코트 바깥 나무 그늘에 키세가 서 있었다.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끝났어요?"

 나는 작게 말했다.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어."

 "도와줄게요."

 그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코트를 반쯤 가로질렀을 때 그의 발치에 농구공이 채였다. 그는 자리에 멈춰서더니 그 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두어 번 공을 튕겨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지만 종아리가 딱딱해져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자세를 잡고 골대 쪽을 바라보았다. 공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팔과 어깨를 감쌌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요."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의 반쯤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오미넷치 농구하는 거."

 나는 키세의 팔에 의지해서 공원을 내려왔다. 주차장에 그의 차가 있었다. 집까지는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는 도중에 핸들을 꺾었다. 나는 그가 편의점에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온 얼음 주머니를 무릎에 댄 채로 조수석에 퍼져 있었다. 온 몸이 쑤셨다.

 도시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닌데 키세는 요령 좋게 이리저리 핸들을 꺾어 시종일관 내가 알지 못하는 길로 차를 몰았다. 마치 세상 모든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그도 이따금씩 길을 잃었고 원하지 않는 길로 접어들어 당황했다. 그럴 때면 그는 눈을 굴리거나 핸들을 두드렸지만 어떻게든 차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초저녁에는 결국 도시를 벗어났다. 아득한 들판에 포플러 나무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그 아래에 젖은 강이 황금빛 몸을 길게 뉘여 있었다. 도로에는 우리뿐이었다. 키세는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녹색 풀숲이 점점 검은 띠로 변하고 강은 녹아내린 것처럼 나른하게 빛났다. 모르는 길과 모르는 세상을 표시하는 표지판들은 읽을 새도 없이 스쳐갔다. 얼음은 모두 녹아버렸다. 차 안에는 그르렁거리는 엔진소리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공을 쥔 키세를 보았을 때,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그 앞으로 뛰어가 예전처럼 서로의 눈을 보며 다음 움직임을 가늠하고, 손을 뻗고, 달리고 싶었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키세가 그 기분을 알까? 머리 위로 들어올린 공이 결국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었던 키세가?

 물론 그는 알 것이다.

 그가 내려놓은 공의 무게를, 땀에 젖은 옷이 등에 달라붙는 감촉을, 악문 잇새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신경이 집중되고 눈동자가, 온 지구가 한 점으로 조여 드는 느낌을. 그 역시 알고 있지만. 알고 있겠지만.

 뺨이 축축하게 젖었다. 키세는 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강 아래로 한 무리의 어린애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듯 했다.

 

 술의 가장 큰 미덕은 아무도 주정뱅이에게 새로운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세는 똑똑한 녀석이었지만 그것을 먼저 깨달은 것은 나였다.

  

 팀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며칠 후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집에 사람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아마 야마토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술을 마셨고, 몇 장의 거울이며 접시를 깼다. 키세의 갈색 소파에서는 구역질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협탁 위의 잡지들은 술에 젖었다. 키세는 정신을 잃은 나를 깨우기 위해 몇 번인가 샤워기 아래에 세워 찬 물을 맞혔다. 나를 부축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수건으로 나를 감싸안고 뺨을 두드리고 머리를 문지르고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정신차려요."

 먼 곳의 응급실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는 내 의료보험에 술과 관련된 기록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의미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얼마 가지 못할 거라 여겼다. 키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동안 나는 반바지를 입은 그의 뜨끈뜨끈한 허벅지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그를 자세히 뜯어보았고 그 역시 나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는 자주 얼굴을 찡그리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마치 백 년이라도 이렇게 살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봐."

 내가 말했다.

 그는 무릎을 세운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한낮이었지만 온 집은 두꺼운 커튼을 쳐 어두웠다. 바닥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빈 병과 음식들이 담겨있던 일회용 용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빈 집을 찾아냈던 적이 있었지. 테이코 때. 누가 온천에 가고 싶다고 해서, 기분이라도 내자고 개천에 갔다 오는 길이었잖아. 장난을 치다가 가방 채로 물에 빠져버려서 갈아입을 옷도 다 모래투성이가 됐고. 그때 내 새 농구화에 들어간 모래가 한 달이나 남아 있었어. 미도리마가 얼마나 짜증을 냈었는지."

 키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가에 집을 발견한 건 나였는데. 마당이 딸려 있는 주택. 기억나? 수돗물을 좀 쓸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문을 두드렸는데 이미 사람들이 떠난 지 오래였지. 마당에 꽃이며 풀들이 엉망으로 자라 있었어. 물이 없어서 씻을 수는 없었지만. 결국 다같이 거기서 옷을 말렸어. 맑은 날이었지만 가끔 구름 때문에 그림자가 지면 몸에 소름이 돋았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구경도 했잖아? 가구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긁힌 자국이 남아있었고, 버리고 간 물건들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지. 고장 난 라디오, 바닥을 굴러다니는 동전, 죽은 벌레, 액자 같은 것들..."

 옷이 다 마르고 나서 우리는 그 집을 빠져나왔다. 칠이 벗겨진 철문이 끽끽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키세가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때 난 그런 게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생각이 나기 전까지는. 그 사람들은 지금쯤은 어디에 있을까? 홀딱 젖어 문을 두드리는 중학생들과 라디오와 마당의 빈 빨랫줄과 오래된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와 황금빛 모래와 강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버리고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다시 강가로 내려가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다같이 말도 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키가 웃자란 어린 친구들의 뒤로 길다란 그림자가 모래 위를 가로질렀다. 몇몇은 손에 신발을 들고 있었다가진 것이라고는 강가의 모래처럼 반짝이는 재능과 몇년 후가 되면 얼굴이 가물가물 할, 생애 최고의 친구들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 때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잖아. 강둑 위에서. 평화롭게. 지는 해를 등지고 서서."

 나는 덧붙인다.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알지?"

 키세는 대답이 없다. 나는 그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창가로 다가간다.

 "아오미넷치."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커튼 틈으로 밖을 내다본다. 키세의 집 앞 골목길은 세 갈래로 나뉘어져 차례차례 멀어진다. 나는 눈으로 그 길을 따라 걸어본다.

 그는 질리지도 않고 종종 던지곤 하는 고약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오늘은 농구 할거예요?"

 그 말에 담긴 메세지를 알아차린 지는 한참이 되었다.

 나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 아래로 술을 쏟아버린다. 키세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 눈동자의 반에는 하늘이 그리고 나머지 반에는 내가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가 어떤 기색을 비추기를 기도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할 말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대답을 하건 키세가 그 대답을 미리 알고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대답 대신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웃었다. 아주 오랜만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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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레이먼드 카버, 정자.

[쿠로코의농구/황립] 어리광 

노노님 리퀘: 황립 둘이 노는데 키세한테 여자들이 넘 많이 들러붙어서 선배가 키세 쉴드 쳐주는거..였는데 리퀘 내용과 백만년정도 떨어진 듯한 그런.. 결과물이...죄송합니다 리퀘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카사마츠는 며칠째 쪽문으로 하교했다. 쪽문은 학교 뒤편으로 통했는데 그 쪽은 역도 없고 정류장도 멀어 정문을 놔두고 일부러 그리로 하교하는 학생은 드물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카사마츠는 부 활동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부실을 빠져나와 학교 뒤뜰을 지나 쪽문으로 향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일찌감치 기세가 꺾인 12월의 햇빛이 시무룩하게 땅바닥을 긁고 있었다. 걸음마다 축축하게 젖은 낙엽이 밟혔다. 강당 옆의 보도블럭, 학교 건물 뒤의 통로, 뒤뜰을 지나는 동안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쪽문을 지나친 순간 모퉁이에서 키세가 툭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살갑게 말을 붙여오며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와 선배! 이쪽 길로 다니세요? 저는 이쪽은 잘 안 오는데! 그늘이라 춥잖아요. 오늘은 여기서 누구 만나기로 했는데 바람 맞았어요. , 정말 기진 맥진이에요. 오늘 연습 심하던데요. 에이, 엄살이라뇨. 정말 힘들었다고요! 저 여기 팔에 부딪힌 거 보이세요? 아까 샤워하고 나오는데 어질어질해서 벽에 부딪혔어요. 아프겠죠? 그쵸? 현기증 그런 게 다 혈당량이 부족해서 그런 거래요. 선배는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선배, 저랑 뭐 좀 먹고 가실래요?"

 어찌나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지 마지막 한 문장을 제외하고는 달리 대답을 할 틈도 없었다. 카사마츠는 보도블럭만을 내려다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역으로 향하는 주택가를 지나고 있었다. 새삼 키세를 돌아보니 그는 보통 '나란히 걷는다'고 할 만한 거리보다 멀리에서 걷고 있었다. 약간 허리를 구부리고, 눈을 맞춰오는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어쩐지 거절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내가 왜?' 평소라면 곧장 내뱉고도 남았을 대답은 입 속에만 맴돌았다.

 싸인을 해달라며 다가온 여자가 일곱 명째. 키세는 줄곧 카사마츠의 눈치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가버릴까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여고생들은 애초 목적이었던 싸인을 받고 나서도 사진을 찍는다, 질문을 던진다 법석을 피우며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커피 한 잔, 토마토 주스 한 잔, 그리고 겨울 한정이라던 손바닥 반 만한 타르트가 한 접시 놓여 있었다카사마츠가 음료의 절반 이상을 마시는 동안에 키세는 커피에 입도 대지 못했다. 그는 수시로 카사마츠쪽을 돌아보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작 카사마츠는 별 생각이 없었다. 다소 지루하긴 했지만. 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키세가 카사마츠를 데려온 가게는 학교 근처의 자그마한 카페였다. 남자 둘이서 앉아있기에는 과할 정도로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했다. 분홍색 커튼이 달린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이미 입 안에서 단내가 났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나가고 싶었다.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은 돌아본 키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뭐냐, 이런 데는...'

 키세는 답지 않게 어색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처음 와보는데요. 그냥 조용하다고 들었었어요.'

 그러니까 둘이서 조용한 곳으로 가려고 했단 말이지. 카사마츠는 속으로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키세 쪽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후로 메뉴를 시키는 동안의 짧은 대화 -'사랑가득꿀꿀딸기? 이름이 뭐 이래?', '딸기 우유라는 뜻 아닐까요?', '카페에서 딸기 우유를 팔아?', '그러게요.'-를 제외하고는 계속 그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지금의 소란스러움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카사마츠는 키세의 쩔쩔매는 모습을 일방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일주일 전에 진 빚을 갚는 느낌이었다.

 부실에는 개인 연습을 늦게 마친 카사마츠와 늦장을 부리고 있던 키세만 남아 있었다. 연습이 개운하게 끝나 기분이 좋았던 날이었다. 키세가 요령 좋게 몇 마디 말을 건넸고, 자신도 뭐라고 대꾸하며 웃었던 것 같다. 창문으로 햇빛과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카사마츠는 벤치에 앉아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 동안 키세는 라커에 기대어 서 있었다. 멀리 운동장에서 야구부의 구령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닫으라고 말했더니 군말 없이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닫았다. 신발 끈을 다 묶고 그를 돌아볼 때까지 키세는 여전히 그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카사마츠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뭐해? 가자.'

 턱으로 문을 가리키자 키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뭔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 같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격투를 하는 사람들처럼, 카사마츠는 지금이 물러냐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고, 키세는 카사마츠가 뭔가 낌새를 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카사마츠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키세는 눈썹을 늘어트리고는 말했다.

 '저 선배를 좋아함다.'

 카사마츠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신만이 아시리라. 무슨 대답을 하고,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흐릿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냥 농담으로 넘길 수도 있었을텐데, 키세의 표정이며 자세가 너무 진지해서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그저 제대로 듣지 못한 척 했지만 그런 게 들어 먹힐 리 없었다. 다행히 키세는 제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냐거나 대답을 해달라거나 하는 식으로 나오지 않았다. 키세는 자연스럽게 평소대로 카사마츠를 따라 부실 문을 단속하고, 가방을 메고 함께 하교 했다. 마치 아까 한 얘기는 전혀 없던 것처럼 태연한 태도였고, 대화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 점이 오히려 더 카사마츠를 당황시켰다.

 둘은 각자 가야 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카사마츠가 걸어갈 길은 내리막이었다. 등 뒤로 해가 지고 있어 발치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길 양 쪽에는 늘 보는 익숙한 풍경이 늘어서 있었다. 만두 가게, 분식집, 안경 가게... 어느 건물의 학원에서 어린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쏟아져나와 카사마츠를 향해 왔다. 카사마츠는 생각에 잠겨 걸었다. 혹시 아까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아이들의 무리는 카사마츠를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저들끼리 장난을 치며 뒤로 달려 갔다카사마츠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까 그 모퉁이에 여전히 서 있는 키세를 발견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을 흔드는 모양새로 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카사마츠는 손을 들어 그 인사에 화답했다. 다시 돌아서서 걸어가는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뒤로 카사마츠는 의도적으로 키세를 피했다. 부활동 중에는 얼마든지 평소처럼 대할 수 있었지만 단 둘이 있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무섭다거나 징그럽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카사마츠의 감정은 미안한 느낌에 가까웠다. 키세가 뭔가를 바라고 고백을 했을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카사마츠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단 둘이 있는 상황을 피해도 키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렇게 함께 카페에 온 것이었다.

 아무리 유창하게 말을 늘어놓더라도 속아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를 기다리느라 빨갛게 얼어붙은 귀와 빨라진 말씨를 감출 수 없음을 키세도 알고, 카사마츠도 알고 있었다. 카사마츠는 내심 키세가 그 날의 일을 정리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다시 키세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아이들이 옆에 서 있은 지 십오 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카사마츠는 그가 쉽게 이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키세는 욕심이 너무 많았다. 여자아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감수하던가, 카사마츠의 기분이 상할 것을 감수하던가 둘 중 하나였다. 모두를 기분 좋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백 하지 않고 원래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고백을 하고 변화를 감수하거나. 키세는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은 전하고 싶다. 그러나 카사마츠가 저를 피하는 것은 싫다. 그러니 기껏 쪽문에서 자신을 기다려놓고도 지난 일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게 아닌가. 오히려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에 안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둘만 있게 된다면 자신이 하게 될 말이 두려울 테니까. 카사마츠 자신도 지난 일주일 동안 그 문제를 피하지 않고 고민한 것은 아니지만서도, 키세는 어리광도 정도가 심했다.

 이제 카사마츠의 컵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의 타르트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건들지 않은 타르트는 예뻤지만 카사마츠에게는 너무 달아 보였다. 겨울 한정이랬나. 한정이라. 그래 한정 좋지.

 카사마츠는 겨울 한정 아량을 베풀기로 결심했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테이블 아래로 키세의 다리를 걷어찼다.

 "으악! 선배?!"

 키세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카사마츠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주변에 몰려서 있던 여고생들이 조금씩이나마 뒤로 물러섰다. 카사마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세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선배... 화났어요?"

 키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녀석이 나보다 두 살 어리던가? 카사마츠는 키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자."

 "?"

 "언제까지 사람을 목석처럼 앉혀놓을 거야! 차라리 우리 집에 가자."

 키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심한 얼굴이었다. 카사마츠는 손을 뻗어 그의 정수리를 아프도록 꾸욱 눌렀다.

 "빨리 빨리 안 움직여?!"

 "? , !"

 카사마츠는 먼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가게 문을 열자 찬 바람이 머리를 쨍 하게 울렸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생각을 모두 날려버릴 듯한 바람이었다. 등 뒤로 키세가 따라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리본] Time

2013. 1. 19. 03:51

[리본/야마고쿠] Time




 2주간 진행 될 방학 보충 수업의 첫 날이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도망치듯이 학교를 빠져나갔다. 구름 그림자만이 이따금씩 텅 빈 운동장 위를 서성였다. 여름 방학은 더디게 흘렀다. 낮이 너무 길어서 좀처럼 시간이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고쿠데라는 질린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교실은 냉방이 잘 되는 편이라 수업이 끝나고도 한동안 시원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정오의 뙤약볕과 습기 속을 걸어 선풍기 한 대만이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원룸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츠나요시의 집에는 며칠 전부터 비앙키가 진을 치고 있어 갈 수 없었다. 이런 날씨에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신세는 피하고 싶었다. 고쿠데라는 유리에 머리를 박으며 중얼거렸다. 

 "...지겹다."

 "오늘은 그래도 선선한 편이야."

 "장난하냐? 선선은 무슨..."

 야마모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부활동을 마치고 교실에 올라온 참이었다. 그가 걸친 셔츠에는 아직까지도 접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요즘 야마모토는 운동 후에 갈아입을 옷을 따로 가지고 다녔다. 오전 중에도 날씨가 너무 습하고 더워서 다른 부원들도 부실에서 샤워를 하고 곧장 옷을 갈아입는다고 했다. 왼쪽 어깨에 걸친 웨스턴백에는 아마 땀에 절은 운동복이 들어있을 터였다. 고쿠데라는 그의 아버지가 그 옷을 깨끗이 빨아서 말리고 내일 입을 새 셔츠를 곱게 접어두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고쿠데라는 성급히 찌푸린 얼굴을 돌렸다.

 야마모토가 창가로 다가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쿠데라는 그의 옆얼굴이 몇 년 전에 비해 말라 보인다고 생각했다.  

 "진짜야. 맑은데."

 과연 푸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그림처럼 떠 있었다. 야마모토가 명랑하게 말했다. 

 "이런 날에 저 언덕 가봤어? 엄청 멀리 보인다?"

 고쿠데라가 심술궂게 대꾸했다. 

 "멀리 어디? 바다?"

 야마모토가 그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럴걸? 가볼래?"

 

 아마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쿠데라는 순순히 야마모토를 따라 나섰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몇 명인가 야마모토의 친구들을 마주쳤다. 야마모토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고쿠데라는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고쿠데라에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문을 지나쳐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고쿠데라는 야마모토에게 이 길을 아느냐고 물었다. 

 "우리 아는 길이잖아." 

 고쿠데라는 주변을 돌아보고는 곧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밤에 왔었나 보네."

 몇 번인가 꺾어진 모퉁이를 도는 동안 멀리 있는 언덕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고쿠데라가 모퉁이의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한 동안 두 사람은 열중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걸음은 쉬지 않은 채였다. 

 고쿠데라로서는 가끔 야마모토의 걸음을 따라가기 힘들 때도 있었다. 야마모토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눈에 띄게 키가 웃자랐다. 고쿠데라 역시 키가 많이 자랐지만 야마모토를 따라잡기에는 부족했다. 이제 나란히 서 있을 때 그의 어깨를 치기라도 하려면 팔을 조금은 위로 뻗어야만 했다. 야마모토가 운동을 계속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종종 고쿠데라를 약 올리곤 했다. '담배 때문일걸?' 그럴 때 고쿠데라는 시간이 흘렀음을 절감했다. 자신이 그런 도발에 이전만큼 발끈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야마모토의 웃음이 부쩍 어른스러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야마모토의 웃음에는 여전히 어리고 싱그러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츠나와 관련된 몇 번의 고비를 넘기는 동안 중학생 시절의 웃음에서 천진한 구석은 점차 사그라 들었다. 고쿠데라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등허리에 땀이 흐를 지경이 되었을 때 언덕으로 이어지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넓은 오르막길이 눈 앞에 나타났다. 폭이 3m 정도 되는 길의 양 옆으로 곧게 자란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경이 잘 된 길 입구에 세워진 작은 표지판에는 '나미모리 언덕길'이라는 소박한 이름이 써 있었다.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 사라지고 발 밑에 폭신한 흙이 밟히기 시작했다. 야마모토는 걸음을 늦췄다. 

 "아, 길 잃은 줄 알았네." 

 안도한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쿠데라는 야마모토의 걸음이 그렇게 빨랐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주먹으로 야마모토의 어깨를 가볍게 밀쳤다. 

 "야 너 길 몰랐냐."

 "아니, 알았는데."

 야마모토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고쿠데라는 코웃음 쳤다. 

 "웃기시네."

 "진짜. 맹세."

 "아, 진짜... 아오..."

 "어쨌든 왔으니까 됐잖아"

 대화를 나누면서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그늘 아래로 들어서자 비로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녹색 잎사귀들이 바닥에 왁자지껄한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먼저 실소가 터진 것은 고쿠데라 쪽이었다. 두 사람은 킬킬거리며 걸었다. 

 언덕을 절반보다 조금 덜 지났을 때, 야마모토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비 와?"

 "뭐?"

 "비 오는데?"

 고쿠데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다 해가 약간 흐리긴 해도 여전히 맑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이내 분무처럼 얼굴 위로 흩뿌려지는 작은 물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고쿠데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 이게 뭐야!"

 "으아, 옷 갈아입었는데!"  

 야마모토가 덥썩 고쿠데라의 손을 잡았다. 고쿠데라가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뛰어, 뛰어!"

 "아, 왜!" 

 뛴다고 안 맞냐고! 왜 비가 오냐고! 선선하고 맑다며! 

 그래도 뛰어! 여우빈가봐! 이러려고 시원했나봐! 

 고쿠데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야마모토가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대답했다. 대단한 빗줄기도 아닌데 온통 호들갑을 떨어대며 달리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야구팀 제일이라는 야마모토의 달리기를 따라 진녹색 여름의 풍경들이 요란하게 뒤로 물러났다. 햇빛과 싱그러움과 작은 물방울이 눈 앞에서 황금빛으로 뒤섞여 폭죽처럼 터졌다. 언덕의 경사가 점점 심해지며 웃음 소리는 거친 숨소리와 뒤섞여 거의 흐느끼는 소리처럼 변해버렸다. 반발자국 앞에 달리는 야마모토의 셔츠가 물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바람결에 땀냄새와 비누향기가 섞여 있었다. 

 정말로 지나가는 비였는지 언덕 정상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비가 완전히 그쳐 있었다. 야마모토는 언덕 가장자리에 서서 들척지근하게 몸에 달라붙는 옷을 억지로 털어냈다. 고쿠데라는 기진맥진해 무릎을 짚고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볼 여유가 생겼다. 

 언덕은 과연 야마모토가 말했던 대로 꽤 먼 곳까지 경치를 보여주었다. 이제 겨우 정오를 지난 해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듯이, 하지만 갑작스러운 비구름에 다소 지친 것처럼 비스듬히 마을을 내리쬐고 있었고 그 아래로 고만고만한 작은 주택들이 비에 젖어 반짝거리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중학교 무렵 홀로 일본에 찾아온 이래 쭉 머무른 동네지만 이렇게 전체를 조망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나미모리는 정말 말 그대로 '보통의 마을'이었다. 이 안에서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야마모토가 고쿠데라를 향해 돌아섰다. 하얀 셔츠가 그 얼굴을 눈부시게 밝히는 듯 했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 

 "방학이 끝나고 출국할거지?"

 고쿠데라는 그의 이마가 여전히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손을 뻗지는 않았다. 소꿉장난 같던 연애가 흐지부지 된 뒤로 고쿠데라는 한 번도 먼저 야마모토의 얼굴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었다.  

 "그 전에 갈 것 같은데."

 고쿠데라가 말했다. 형편없이 젖고 지쳐서 끔찍한 기분이고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담배를 참고 싶었다. 츠나요시가 약속한 기한이 다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그는 평범함 삶을 택했다. 고쿠데라는 홀로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야, 바다는 안 보이는데." 

 고쿠데라가 힘을 짜내어 투덜거렸다. 야마모토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언덕 멀리를 바라보았다. 

 고쿠데라는 어린 시절이 지긋지긋했다. 어른이 되기까지는 길고 긴 한 낮이 남아있었고, 어른이 되지 못하는 한 그는 언제나 무기력했다. 어떻게 해야 시간이 지나갈까. 빨리. 빨리. 빨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관통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야마모토와 츠나요시를 끌어들였던 것도, 치기 어린 고백을 받아들였던 것도, 혼자서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기에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어른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다. 그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러리라 믿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어쩌다 비라도 맞는 날에는 하굣길의 빼곡한 우산들 틈을 뚫고 야마모토의 방까지 달려갔다. 깎지를 낀 손가락은 아직 통통하고 덜 여문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방울에서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야마모토의 방에 누워 있으면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은은하게 울렸다. 도망치고 싶은 밤이 이어져도 몇 번이고 그의 상냥함에 의지했다. 시시한 일에 함께 울고 웃으며 무슨 수를 써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달려왔다. 지금처럼. 

 고쿠데라는 자신이 준비될 때까지 야마모토가 뒤를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혼자 지새울 수많은 밤 중에 몇 밤은 영원히 새지 않을 것처럼 괴로우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날은 어김없이 밝아오리라는 것도 알았다. 시간은 앞으로도 한동안 느리게 흐를 테지만, 그들은 지금보다는 빠르게 어른이 될 것이다. 

 고쿠데라는 풍경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를 신중하게 눈에 담았다. 잠시 후 야마모토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러네, 정말 바다는 안보이네."

 고쿠데라가 말했다. 

 "내려가자."

 야마모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언덕을 내려가기 전 고쿠데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미모리의 하늘 저편으로 먼 구름이 달아나듯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는 입 안으로 들리지 않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웠어.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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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반 년만의 글이라 욕심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썼다. B'z의 time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나의 이십대 초반과 리본을 떠나보내는 글. 

[건담00] 내게로 와

2011. 6. 11. 15:38

[건담 더블오] 빌리 카타기리, 그라함 에이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밤이었고카타기리는 누워 있었다그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달리 무엇을 입어야 좋을 지 몰랐기 때문이었다아침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생략할 수 있었다하지만 어딘가 불편하기도 했다평소처럼 카타기리가 그의 무신경함을 비난한다면 터무니없는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변명을 대신할 수 있을 테지만, 카타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보고 불을 껐다문을 닫았지만 복도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그는 몇 시간째 앉아있던 의자로 돌아왔다그리고 곧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밤길을 달리는 차들이 내는 바람소리가 들렸다그는 습관적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미나는 내가 돌려보냈네한시라도 자네 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일 아침부터 며칠간은 쉴 수 없을 테니까쓰러져서는 곤란하잖나.”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둔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겠군난 요즘 시계를 집에 놓고 다니네미리부터 그런 얼굴 하지 말게별로 이 나이에 히피가 된 건 아니니까 말야.”

그는 조금 웃었다사실 카타기리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카타기리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예전에 자네가 한 번쯤 시계를 신경 쓰지 않고 작업해보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네자네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야그 때 자네는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거든잠을 못 자서 말이야그러고 보면 파일럿이란 직업은 적어도 잠이 심각하게 부족할 일은 없으니 그 점 하나에 있어서만은 기술자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있는 셈이지안 그래물론 그것 말고도 좋은 점이라면 무수히 많지만…… 자네는 대단한 기술자지만이해하기는 힘든 친구야도대체 그 격납고에 틀어박혀서…… 그래관두지여하간 얼마 전에 갑자기 자네가 했던 그 말이 생각났네그래서 한 번 시계를 보지 않고 다녀보기로 했지안 그래도 난 요즘 시계를 보는 데 이력이 나 있었어우리 둘 다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유니온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시간에 쫓겨 다녔으니 말이야. 난 이제 자네를 재촉하는 것에도 질렸어.”

그는 탁자에서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어둠 속에서 카타기리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병원은 짜증이 나네요즘 올 일이 너무 많아자네가 나 때문에 병원에 왔던 적도 몇 번 있었지내가 플래그의 테스트 파일럿일 때였어이번에는 물론 기억하겠지자네는 그 날을 잊지 못할 거야순전히 내 실수로 일어난 사고였는데도.내가 그 때 그랬지자네가 과로로 죽어도 난 그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고그런데도 자네는 심하게 울었지안 그래병원에 오기 전에 말이야자네도 그게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테고어쩌면 창피하다고도 생각했겠지자네는 태연한 모습으로 날 찾아왔지만 난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럴 때가 있지나는 감이 좋으니까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것을 눈치채게 될 때가 있어시계를 두고 다니면 말일세.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는지 매번 놀라게 된다네아마 자네도 정신을 차리고 나면 깜짝 놀라겠지믿고 싶지 않겠지만 자네는 예전보다 더 비쩍 곯았다고.”

그는 문득 자신의 이야기에 초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그답지 않은 일이었다가장 음울한 시절에조차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명석했고 유쾌했다그는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탁자 위에는 몇 장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의사는 언제 이 방에 올 것인가그는 무심결에 시계가 걸려있을 법한 벽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시계는 없었다.

며칠 전에 예건 크로우의 가족들을 만났네지난 주에는 빅토르 레오노프의 가족들을 만났고도대체 그 사람들이 뭣 때문에 나를 찾는지 모르겠어유품을 전해줄 때는 유품만 전해주면 그만이 아닌가차라리 그 사람들이 내 뺨을 쳤으면 좋겠다 싶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그는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는 의료기기의 옆에 섰다머리를 조금 뒤로 젖혔다가 다시 카타기리를 내려다보았다날이 밝기 위해서는 아직도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8.

그는 의사가 언제 이 병실을 찾을 지 알고 있었다다섯 시가 되기 전에 미나가 돌아올 것이다사제는 부르지 않을 작정이었다미나는 울지 않을 것이다.

카타기리의 이마는 그늘져 있었고움푹 꺼져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는 그 이마에 손가락을 올려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그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물을 마시려 했지만 컵은 비어 있었다그는 가만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힘줄과 잔뼈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복도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트 자락에 손 끝을 가져다 대었다.

 이봐무슨 말이라도 해보게.”

카타기리는 조용했다.

“아무 말이나 괜찮아.”

시간이 흘렀다



롤러코스터, 내게로 와.
http://www.youtube.com/watch?v=QxDHXDKOX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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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그릇을 헹구는 사이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는 a의 집 현관 앞을 지나, 화단 사이의 돌계단을 내려갔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A는 귀를 기울였다. 행주를 쥐고 있던 손이 개수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a는 바닥이 젖는 것도 알지 못하고 목을 길게 뺐다. 남편 방 너머의 베란다로 보이는 대문의 귀퉁이는 잘 닫혀 있었다.

 a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개수대의 여기저기에 세제 거품이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물을 틀어 그것을 흘려 보냈다. 행주를 꾹 짜고, 그릇들을 차곡차곡 겹쳐 쌓으면서 그녀는 습관적으로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대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닫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부엌에서는 대문의 전체 모습을 결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물을 잠갔다. 끼릭거리는 소리가 길게 늘어지다가 멈췄다.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몇 번 사람을 부르려 했었다. 수화기 너머의 배관공은 그녀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물탱크가 막힌 거 아녜요? 오늘 오후에 가보겠습니다. 주소가 어딘가요?

 말의 끝에 찍, 하는 소리가 났다. 입술 사이로 침을 뱉는 소리였다. 그것은 실종된 남편의 술버릇이었다. 입술 사이로 내뱉는 침은 손찌검이 시작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남편은 일년의 절반을 집 밖에서 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 그런 거라면 제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뇨, 아줌마, 저희가 한 번 가서 볼게요.

 a는 전화선을 손가락에 말았다.

 -괜찮아요. 끊을게요.

 -, 어디예요? 가서 한 번 봐드린다니까?

 다시 한 번 침 뱉는 소리가 났다. a는 전화선을 손가락에서 풀어내었다. 그녀는 백치처럼 눈을 크게 떴다.

 -뭐라구요?

 -지금 가겠다구요. 주소가 어떻게 되신다구요?

 -정말 괜찮아요.

 a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유리병에 맞아 머리를 꿰맸던 자리가 쑤셔왔다.

그녀는 몇 번인가 물탱크에 올라가보기도 했다. 물탱크가 막혔다고? 그녀는 중얼거리며 물탱크 옆면에 매달린 사다리를 노려보았다. 사다리를 오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행주를 쥐어짜며 a는 다시 한 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이러다 노이로제에 걸리겠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다 집에 남자가 없기 때문이야." 

 낮이라 불을 켜지 않은 부엌은 어스름하게 어두웠다. a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식탁을 닦다 보니 얼마 전에 아들이 제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약간 죄책감을 느끼며 덧붙였다.

  "물론 이제 괜찮지만."

 그녀는 아들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어제 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제대하자마자 여자를 사귀기 시작한 것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제대한 아들의 침대 밑에는 화장품 상자가 하나 있었다. 상자 안에는 화장품 대신 낯선 소년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그녀는 아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상자를 도로 제자리에 두었다. 다음날 청소기를 돌릴 때는 그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상자를 본 것이 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둑이 들었었어?

 아들은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며 반문했다. 그는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에 갑자기 존댓말을 쓰기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그녀는 질색하며 그것을 그만두게 했다.

 -그래, 지난 주에.

 여자는 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대답은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구나. 여자가 말했다.

 한참 후에 아들이 물었다.

 -어쩌다가 도둑이 든 거야? 칠칠치 못하게.

 -글쎄.

 a는 베란다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들이 물었다.

 -아빠는 한 번도 안 왔고?

 -.

 부엌일을 마치고 a는 현관을 나섰다. 파마가 풀려가는 옆 머리가 자꾸 흘러내렸다. 그녀는 연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래가는 파마라더니. 그녀는 그녀를 언니라고 불러대던 젊은 미용사를 떠올렸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믿을 수가 없어."

 a는 아들이 돌아오면 이 일에 대해 꼭 말해주리라 다짐했다. 3만원이나 준 파마가 한 달 만에 풀렸다는 사실을 들으면 그는 분명 몹시 화를 낼 것이다. 아마 너무 분개한 나머지 미용실로 쫓아가려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녀는 그를 말릴 것이다. '얘야, 괜찮아. 파마는 다시 하면 되니까.' 아들은 욕을 할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년, 썩을 년.

 그녀는 그에게 욕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부엌일을 마치고 a는 건물을 돌아 계량기가 있는 벽에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이 표지로 가져다 놓은 큰 돌 위에 올라섰다. 돌은 올라서기에 적당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녀는 벽에 손을 짚어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녀는 점차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급적 침착하려 애쓰며 목을 길게 늘였다. 그 위치에서 그녀는 빌라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는 대문과, 그녀의 집 베란다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오후가 다 지나도록 그곳에 서 있었다. 물을 마시러 집에 들어오자 3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저녁이 되어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a는 여섯 시에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대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고 다니는 사람이 누군지 꼭 찾아내야만 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었다. 일곱 시쯤 되면서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a는 손에 모종삽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거기서 뭘 하냐고 물으면 밭을 보고 있다고 말할 참이었다. 혼자 사는 여자는 언제나 변명거리를 마련해두는 편이 좋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아들의 존재를 떠올렸다. 갑자기 모종삽을 든 손에 자신이 없어졌다.

 도둑이 든 그 날도 그녀는 모종삽을 손에 들고 있었다. 건물 옆의 손바닥만한 흙에 그녀는 여러 가지 채소를 키웠다. 가끔은 꽃도 심었다. 그날 그녀는 금잔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작은 꽃에 물을 뿌리려는 순간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닫고 다니라는 주의를 주기 위해 허리를 폈다. 서둘러 건물 모퉁이를 돌아 나왔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 대문을 닫았다.

a는 다시 금잔화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베란다의 창문 쪽으로 고개를 들렸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밀어젖히는 소리, 열어보는 소리. 여자는 아들이 휴가를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충망 너머로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키가 작은 인영이 어슬렁 어슬렁 거실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도둑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어.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럴 줄 알았다고.

모종삽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여덟 시가 되었다. 빌라에는 여덟 가구가 살았다. 1층부터 3층까지는 모두 집주인이었고, 42호는 전셋집, 41호는 월셋집이었다. 41호에 젊은 여자와 여자의 동생이 이사온 지는 이제 막 넉 달이 되었다. a는 그들이 이사온 뒤부터 부쩍 문이 열려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오랜 이웃들은 늘 문을 꼭 닫고 다녔다.

 a 1층에 사는 사람의 불안을 토로하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 참, 누굴까? 우리 집은 문을 꼭 닫아요. 아시죠? 위험하니까요.

 41호의 얘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보통 a였다.

 -혹시 41호 사람들이랑 얘기 좀 해보셨어요?

 -아뇨.

 -그 집 아가씨랑 동생 말인데요,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랬나요? 잘 기억이...

 -젊은 아가씨가 일도 안 나가는 것 같고.

 이쯤 되면 사람들은 대개 a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 집이 이사온 지 얼마 안돼서 잘 모르나? 문을 닫고 다녀야 되는데.

 a는 깊이 한숨 쉬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홉 시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a는 계단에 차례로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3, 2, 1.

 유리문을 열고 내려온 것은 41호의 여자였다. 여자는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를 걸친 여자는 평소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a는 쓰레기봉투의 무게 때문에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그녀의 어깨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여자는 문을 열었다. 쓰레기봉투를 버리는 장소는 빌라의 반대쪽 귀퉁이였다. 여자는 대문을 닫지 않고 나갔다. a는 모종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41호의 여자가 돌아왔을 때, a는 팔짱을 끼고 계단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저기요, 아가씨." 

 여자는 a를 발견하고는 무심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방금 문 안 닫았죠?"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a를 바라보았다.

 "그런데요?"

 "그러면 안되지."

 ", 잠깐 쓰레기 버리고 온 거에요."

 "알아요."

 깜짝 놀랄 만큼 심술궂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a가 급히 말했다.

 "가까운 데를 나가도 문을 닫고 다녀줬음 좋겠어요."

 a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거든요"

 "그런데요?"

 어머, 정말이요? 라거나, 놀라셨겠네요! 라는 위로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a는 적잖이 당황했다.

 "대문을 열어놔서 그래요."

 "내가요?"

 "그 집이 이사오기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거든. 전에 보니까 동생도 문을 열고 다니던데."

 "전에 언제요?"

 "그건 기억 못하지. 그냥 계속 그러더라고. 내가 몇 번 불러서 말해야지, 이러다 큰일나지 큰일나지 했는데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니까."

 41호 여자는 발을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목으로만 웃음 소리를 내었다. 

 ", 혹시 그게 아줌마네였어요?"

 "얘기 들었어요?"

 여자는 몸을 뒤척이듯이 허리를 틀었다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뇨, 웬 남자가 이것저것 캐물었다던데요?"

 a는 당황했다. 그녀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니, 동생이 그래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지? 못 쓰겠네. 내가 그냥 불러서 문을 닫고 다니라고 몇 마디 한 거 가지고."

 여자는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줌마, 우리 문 잘 닫고 다녀요."

 "아가씨 방금 문 열고 나간 걸 내가 봤는데 무슨 소리야. 아유, 젊은 처자가 그냥 어른이 말하면..."

 "아 쓰레기 버리고 왔다니까요? 대문 옆에 전봇대 나가는데 그럼 문을 잠갔다가 다시 열어요?"

 "그래도 그래야지. 아가씨가 나간 사이에 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들어오긴 누가 들어와요?"

 "글쎄, 도둑이 들었었다니까?"

 "그럼 우리 집만 걸고 넘어지지 말고 빌라 전체에 공지를 하시든가요. 딴 집 사람들은 출근할 때 그냥 문 열고 다니던데."

 "아냐, 아가씨네만 그래."

 "감시카메라라도 설치해놨어요?"

 "아니, 내가 봤다니까."

 다시 한 번 정적이 흘렀다. 41호 여자는 이제 명백히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a는 손에 모종삽을 쥐고 있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닫고 다닐 테니까 좀 비켜요."

 여자가 a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깃털이 스치는 것처럼 아주 가벼운 손동작이었다. 하지만 a는 따귀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원."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a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은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a는 소파에 누워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아들은 우두커니 서서 서먹하게 a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가 찢어졌을 때에도 아들은 그런 식으로 서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왔니?"

 그의 인사를 기다리다 못한 a가 웅얼거렸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니?"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들은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a는 일어나서 부엌에 들어갔다. 차가운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는 동안 아들이 옷가지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화장실의 문이 닫히고, 곧 물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에서 또다시 끼릭거리는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a는 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소파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고개를 돌리자 문이 열린 남편의 방 너머로 베란다가 내다보였다. a는 아들에게 충분히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친구 만났니?"

 대답은 없었다. a는 천천히 머리 속으로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열 손가락이 제각기 머리카락 사이를 더듬어 상처를 찾았다. 그녀는 아들의 방으로 다가갔다.

 화장실에서는 물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a는 방문을 열었다.

 "41호 말이야. 매번 대문을 열어놓고 다녀."

 a가 청소한지 오래된 방 안은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그녀는 아들의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하게 머리 밑을 더듬으며 옷장 안을 살펴보았다.

 "너 그 집 사람들 만나봤니?"

 상자는 책상 위에 있었다. 그러나 감히 뚜껑을 열어볼 수는 없었다. a는 지난 번에 상자 안에서 보았던 소년들을 떠올렸다. 어리고, 관절이 연약한, 옷을 입지 않은 소년들을.

 머리 위에서 끼릭거리는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가 그쳤다. 아들이 물을 잠근 모양이었다.

a는 아들의 방을 빠져 나왔다. 그녀는 소파로 돌아가 머리를 계속 헤집었다. 아들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서 대답했다. 

 "아뇨."

 a의 손 끝이 상처를 찾아내었다. 상처 표면은 오톨도톨하고 매끄러웠다. 그녀는 손톱을 세워 그 위를 살살 긁었다. 아들은 방으로 돌아갔다.

 a는 베란다가 있는 방을 내다보았다. 작은 사람이 그림자 속을 서성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a는 아침 일찍 계량기 아래로 나갔다. 하루 종일 서 있을 생각이었으므로 돌을 밟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a는 가끔 모종삽을 들고 나타나 사람들과 41호에 대해 이야기했다.

 41호의 아이는 두 시가 넘어서야 나타났다. 아이는 계단을 뛰어내려와, 대문을 열고 나갔다. a는 열려있는 문을, 아이가 닫지 않은 그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이는 오 분 후에 돌아왔다.

 ", !"

 a는 아이가 대문을 지나 유리문에 들어설 때 불쑥 벽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아이의 팔을 잡아채었다. 그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아이는 거의 손에 든 우유를 놓칠 뻔했다.

 "방금 문 안 닫고 나갔지!" 

 a가 말했다. 아이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뭐예요!"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무척 놀란 듯 했다. 아이는 그녀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이의 몸부림이 너무 거센 탓에 a의 머리채가 점점 더 흐트러졌다. 그녀는 가능한 한 침착 하려고 애썼다.

 "방금 문 열고 나갔잖아."

 "아녜요!"

 아이의 손에서 우유가 바닥에 떨어졌다. 터진 우유팩이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a의 언성이 높아졌다. 

 "거짓말하지마!"

 "아니라니까요! 놔주세요!"

 "열고 나갔잖아!"

 "아니야! 누나! 누나!"

 "거짓말쟁이! 왜 거짓말했어! 내 아들이 널 만났다고 거짓말했지!"

 a는 이제 양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파마가 풀린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머리 위에서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21호인 듯 했다.

 "이봐요!"

 41호 여자가 번개처럼 뛰어왔다. 그녀는 곧장 a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a는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아이는 눈을 뒤집고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a는 그때까지도 계속 아이를 흔들고 있었다.

 "이 여자가 뭐하는거야!"

 41호 여자가 외쳤다. 그녀는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a가 떨어트린 모종삽을 주워들었다. 그녀는 모종삽의 평평한 면으로 a의 어깨를 호되게 내리쳤다.

 충격으로 아이를 놓고도 한참을 여자에게 얻어맞으며 a는 어째서 아이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문을 열고 나갔어."

 거의 화단까지 밀려난 a가 고자질하듯이 중얼거렸다. 41호 여자는 씩씩거리며 삽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 이거 완전 미친년 아냐?"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있던 a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뻗었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구."

 a는 상처를 찾아 스스로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맸다. 상처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힘주어 다시 말했다.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고."

 41호 여자는 차가운 눈으로 a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동생을 끌어안았다.

 "민아, 괜찮아. , 이제 괜찮아. 올라가자."

 a는 피아노를 치듯이 손가락을 여러 방향으로 뻗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점점 얼굴을 가려갔다. 41호 여자는 이제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감싸고 보호하듯이 유리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a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화단에 도착할 때쯤 그녀는 머릿속의 상처를 찾았다. 매끄러운 상처의 표면을 살살 긁어내며 그녀는 베란다를 들여다보았다.

 a는 말했다.

 "도둑이 들었다고." 

 아들은 베란다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창문을 열었다. a의 등 뒤 화단으로 아이스크림 막대기가 떨어졌다. 

 

 a는 허우적대며 잠에서 깨어났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그녀는 낮에 그 일이 있은 후에 곧장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누워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집 안은 차고, 조용했다. a는 세수를 했다.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신경에 거슬리는 물탱크 소리를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아들은 외출한 모양이었다. 아들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상자가 놓여있었다. 지금은 뚜껑이 열린 채였다. 그녀는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을 켰다가 금세 다시 껐다.

 a는 방으로 돌아갔다가, 부엌으로 다시 나왔다. 그녀는 집 안을 모두 돌아다니며 불을 켰다. 온 집안이 모두 환해진 뒤에야 베란다와, 베란다로 이어지는 방을 들여다볼 용기가 생겼다.

 a는 대낮처럼 환한 부엌에서 베란다 쪽을 등지고 물을 마셨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집 안이 너무 밝은 탓에 창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 방으로 다가가야만 했다. a는 손만 방 안으로 집어 넣어 불을 껐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베란다 너머, 열려있는 대문의 귀퉁이를 보았을 때 a는 거실 소파 위에서 누군가 몸을 뒤척이는 인기척을 느꼈다.

 

 a는 하릴없이 복도를 서성였다. 건물 전체가 잠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앞 집인 11호의 벨을 눌러볼까 했지만 21호의 창문이 닫히던 소리가 생각나 관두었다. a는 어서 아들이 돌아오길 바랐다. 복도의 센서등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녀를 어둠 속으로 내몰았다. 그녀는 스물 여덟 번째로 손을 휘저어 다시 센서등을 켰다.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 그녀는 초조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화를 들고 나올 것을 잘못했어."

 a는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누군가가 그녀의 목소리와 발소리에 잠이 깨기를 바랐다.

 "하다못해 시계라도."

 그녀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라고. 거의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다. a는 그것이 41호의 아이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센서등이 꺼졌다. a는 발을 조금 움직였다. 센서등이 다시 켜졌다. 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승리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역시 그 여자 아들이었어. 동생은 무슨. 

 a는 저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해야만 했다.

 분명히 애비없는 자식일거야. 그런 부도덕한 여자를 빌라에 둘 수는 없지. 부동산 김씨한테 말해서 쫓아내야 해. 

 a는 위층 쪽을 바라보며 살금살금 걸었다. 그녀가 오랜 시간을 들여 반 층을 올라, 이 층에 올라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4층의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a는 놀란 나머지 무심결에 모종삽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위층에서 내려오는 걸음걸이가 더 빨랐다. a는 급히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었다. 물탱크를 살펴보러 가는 길이었다고 말하면 아무 문제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이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면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a는 어깨를 폈다.

 4층의 불이 꺼지고 3층 복도에 불이 들어왔다. a는 문득 41호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발소리는 이제 반 층 위에 있었다. a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엄마."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는 아들이 서 있었다. 4층은 센서등이 꺼지고도 어둡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형광등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a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어.

 아들이 말했다. 

 "물탱크에 올라갔다 왔어.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a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내일 사람을 부르자."

 ". 그래야겠어. 들어가자."

 아들이 황망하게 말하며 a의 팔을 움켜쥐었다. a는 거실을 오가던 인기척을 생각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가 없어."

 아들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어

 팔을 움켜쥔 아들의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럴 수가 없어." 

 a는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복도의 센서등이 꺼졌다.




==
레이먼드 카버 식으로 찝찝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카버는커녕 너무 못 써서 찝찝하네요.
제목이 저 따위인건 조각글 치고 길어서.. 근데 따로 붙일 게 생각 안나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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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 더블오] 닐 디란디, 그라함 에이커.




 첫 번째 만남. 기묘한 우연이었다. 빌리는 카페에 앉아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세달 후 그라함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리고 6개월쯤 뒤 두 사람은 6년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허물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라함과 닐이 사는 오피스텔에 나중에 입주한 사람은 닐이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소탈한 사람이었다. 친구도 많았고 이따금 과제 때문에 집이나 학교에서 밤을 새었다.
심지어 그는 빌리가 집에 흘리고 간 메모리칩을 기지까지 가져다 준 적도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것을 먼저 제안한 것은 빌리였다. 그는 물론 닐을 출입 제한 구역까지 들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빌리의 생각은 그랬다.
닐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기지에 도착했다. 그는 거진 두 시간 동안 기지 내 카페테리아에서 빌리를 기다렸다.
목격자는? 드문 드문 있었다. 실상 닐이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은 한 시간이 채 못 되었다.
래닝 대령은 폐쇄회로 화면을 정지시켰다. 허겁지겁 뛰어들어오는 빌리를 향해 흔드는 닐의 손이 허공에 붙들렸다. 대령이 물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하지? 카페 주인? 부동산 업자?"

 그라함은 차분했다.

 "저와 카타기리 기술고문부터입니다. 대령님."

 빌리는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라함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령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모니터가 꺼졌다.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닐 디란디는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심문실에 앉아 있었다. 조금 불편한 자세였지만 생각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첫 번째 생각. 닐은 조수석에 그라함을 태우고 빛나는 가로수길을 지나갔었다. 앞 유리창에 날아와 박히는 녹색 빛 조각과 웃음소리. 멀리, 멀리, 파도 소리를 밀어내듯이 오가는 대화들. 까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는 다소 거친 손바닥.
 이런 이야기를 듣고, 세츠나는 더욱 화가 난 듯 했다.

"그렇게 쉽게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원이었다. 그라함이 있는 한 세츠나는 결코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닐은 웃었다. 닐은 그런 것들 때문에 '의무'를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세츠나."

 닐은 잠시 말을 멈췄다. 세츠나의 등 뒤로 분수대가 물을 뿌렸다. 습기 찬 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흥에 겨운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라일이 죽었어. 서셰스와 함께. 카탈론에 있었다더군. 바보 같은 녀석. 이렇게 말하면 그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 땅 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관과 그 위로 흙을 떨어트리는 첫 삽에 대해서.

 "사명은 없어. 의무도. 목숨 값을 갚겠다고? 죄값을 치르겠다고?"

 닐은 커피캔을 기울였다. 보도 블럭 사이로 커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세츠나의 바지에 음료가 튀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세츠나는 닐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닐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하다 못해 그 남자의 집에서 나와라. 이런 식은 곤란해."

 닐은 발코니에 서 있었다. 연극조로 읊조린 말에 그라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새로운 대본인가?"
 "응."

 라일의 신분으로 입학한 대학교에서 닐은 연극을 공부했다. 원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슨 생각이냐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대답은 없었다.

 첫 번째 만남. 미친 짓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노트북에는 유니온 마크가 있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혹은 습관적으로.
 솔빙을 나온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라일의 시체는 서서히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추운 곳에 묻을 걸 그랬나. 닐은 아무것도 애써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는 몇 번이나 시위를 선동해보았고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빌리는 손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단순한 하청업자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닐은 빌리의 전화번호 외에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빌리의 약속 상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그 군인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닐은 그를 미행했고 빌리가 그의 얼굴을 잊기 전 그라함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이번에는 닐도 묻고 싶었다. 무슨 짓이야?

 당연하지만 솔빙 측은 격노했다. 아니, 당황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티에리아는 몇 번이나 닐의 꿍꿍이를 물었다. 가끔 위협적인 말을 건네기도 했다. 어째서 당장 사살하지 않는지 닐은 오히려 그것이 궁금했다. 의외로 무른 데가 있는 조직이었다. 닐은 새삼 그들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티에리아와 스메라기, 세츠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닐 자신도 몰랐으니까.

 그라함은 새로운 룸메이트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23층짜리 건물의 23층이었다. 시야가 트여 좋지 않냐고 묻는 목소리에는 묘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어린아이 같았다. 닐은 자신도 어린아이가 되기로 했다. 그는 무섭다고 대답했다. 그라함은 의외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곧 적응할 수 있을 걸세."

 닐은 그가 무엇이 무서우냐고 물어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이지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23층에서부터, 지하까지. 끝도 없이. 그는 무분별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며. 평범한 생활이라니. 그의 세계에서 그보다 더 무분별한 것은 없었다.
 그라함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를 붙들기에는 너무 불안한 사람이었지만.
 
 간혹 치킨이며 감자 튀김 같은 먹을 것을 잔뜩 싸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반짝이는 야경을 내려다보며 기름진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체중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라함은 난간에 팔꿈치를 걸치고 손을 휘둘렀다. 즐거워 보였다.

 "자네랑 있으면 나까지 어려지는 것 같아."
 "넌 원래 어린애야 그라함."

 닐이 대꾸했다. 차가운 맥주 캔 위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닐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그것을 닦아내었다. 그래, 그는 고작 스물 넷이었다. 늦깎이 대학교 1학년 연극을 전공하는, 무대 위의 라일 디란디.
그라함은 그 공백에 대해서 묻는 일이 없었다. 아마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닐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머리를 끌어당겨 키스해도 그라함은 거절하지 않았다. 아마도 닐이 언제고 떠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닐은 그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백제를 건네고 세시간 후 심문실에 그라함이 들어설 때쯤 닐의 사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로수 길의 녹빛과, 그라함의 머리카락 색이 이리저리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그라함은 분노로 날뛰고 있지도 슬퍼하고 있지도 않았다.
 심문실의 조명은 너무 밝았다. 그라함과는 어울리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닐은 머리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라함, 몰골이 그게 뭐야."

 그라함은 웃었다.

 "자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래?"

 닐은 항의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듀나메스를 타고 하늘을 날았던 때가 생각났다. 물론 카메라에는 적절한 코팅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각도를 잘못 잡으면 햇빛 때문에 시야가 하얗게 질렸다.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럴 때면 그대로 듀나메스가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공연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그라함이 물었다.

 "나도 그걸 묻고 싶군. 누가 이런 일을 시켰지?"
 "아무도."

 빈 손을 들어 보일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터였다. 하지만 두 손은 묶여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고?"
 "그래."

 사실이었다. 닐은 아직 유니온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무엇을 어쩌려던 거였을까. 일부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까지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하지만 막상 단말기에 자료를 옮기기 시작했을 때는 일부러 굼뜨게 행동했다.
 솔빙은 아무것도 몰랐다. 유니온 측에서 무사히 풀려난 뒤에는 그쪽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세츠나는 아닐 것이다. 건담 마이스터가 유니온의 기지에 들어가서 사흘 밤낮을 돌아오지 않았다. 심문을 거친다면 다행, 곧바로 총구부터 들이댈지도 몰랐다.

 "자네가 그렇게 멍청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라함은 실소했다.

 "그러나 자네는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닐은 머리를 흔들고 입을 다물었다. 그라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조금 후에 다시 보지."


 두 번째 생각. 그라함은 간혹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닐에게 자세한 내막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닐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할 지 알고 있었다. 내전, 테러 진압, 명목상의 파병... 무엇이든. 생각은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닐은 학교에 다녀와서 내내 영화를 보았다. 전쟁 영화는 보지 않았다. 로맨틱 코미디, 멜로, 코믹, 스릴러, 무엇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톨레미에 있을 때가 모든 것이 더 생동감 있었다고 느껴졌다.
그라함은 그리 자주 영화를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눈을 빛내기 일쑤였다. 몰입하기 쉬운 성격이었다. 물론 좋아하는 일에만.
 그런 의미에서 그라함은 자신의 일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고아네."

 그라함이 그렇게 말했을 때 닐은 남모르는 기쁨을 느꼈다.

 "군에는 그래서 들어간 거야?"

 그는 정말로 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그 두 가지가 서로 무슨 상관이 있지?"
 "숙식을 제공해주니까."
 "아, 그래. 그건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지."

 그라함은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흩어졌다. 그는 그것들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네."

 이번에는 닐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글쎄."
 "위험한 직업이잖아. 그만둘 생각은 없어?"

 말을 뱉어놓고도 닐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그러나 힐끗 돌아본 그라함은 그저 웃고 있었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차는 이제 내리막에 들어섰다. 닐은 엑셀을 밟았다.


 세츠나는 총 세 번 닐을 찾아왔다. 마지막 방문 때 그는 드디어 화를 내고 있었다. 스메라기의 전언을 전하는 목소리에는 처음의 미약한 신뢰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일주일 시간을 주겠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흘끔흘끔 그들을 돌아보았다. 닐은 캠퍼스의 잔디밭에 세츠나와 함께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세츠나의 비장한 말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닐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비극들은 언제부터 그의 곁에 있었을까? 그라함의 곁에는 언제부터? 닐은 그에게 장례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라함이 먼저 그의 어린 시절을 얘기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몰랐다.

 "그 이후에는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닐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츠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닐은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늘에서 벗어난 얼굴이 저만치 높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많이 자란 모습이었다.
 닐은 톨레미에서의 생활을 생각했다. 끝없는 우주의 어둠. 몸을 잡아당기는 힘이 없는 곳에서의 생활은 몸 구석에 초조함을 쌓아나갔다. 스크린을 보며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제어할 수 없는 허무가 밀려왔다.
 닐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세츠나, 고마웠어."

 세츠나는 당황했다. 그는 몇 번인가 안타까운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눈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걸음걸이에는 거침이 없었고 닐은 방금의 반응이 세츠나가 세상을 대하는 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떨까? 닐은 무릎을 세우고 웃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군."

 그라함이 말했다. 그는 닐만큼이나 지쳐 보였다. 닐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닐이 자신이 건담 마이스터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호된 일을 겪을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닐은 재촉하고 있었다. 낙하산은 필요 없었다.

 "그라함, 혹시 군인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
 "그러는 자네야말로 솔빙을 그만둘 생각은 없나?"

 그만둔 지 오래라는 말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닐은 그냥 웃었다.

 "하하, 그러고 나면?"
 "건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선처를 바랄 수 있겠지. 석방 후에는 유니온의 이름을 걸고 자네의 신변을 지켜주겠네."

 닐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그는 찬찬히 그라함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물을 필요는 없었다. 닐의 신변을 지켜줄 사람은 결코 그라함이 아닐 것이다. 닐은 책상 위에 이마를 대었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라함이 말했다.

 "이번 심문에 협조하지 않으면 다음 번부터는 다른 사람이 올 걸세."

 닐은 웃었다.

 "당신은 어린애야, 그라함."

 머리 위에서 나지막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닐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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