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황녹] 하루
미도리마가 정말로 연애경험이 없는 숙맥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심심치
않게 고백을 받았고,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연애를 시작해 삼 년 동안 총 세 번의 연애를 했다. 키세에 비해 교제 상대의 숫자가 적은 건 사실이긴 했지만 질적으로 더 성숙한 교제를 했다. 사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연애 경험이 아니라 아쉬워 본 경험이었다.
세 번의 연애
중 미도리마가 먼저 고백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그녀들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너는 나한테 관심이 없잖아'라거나, '우린 너무 다른 것 같아'라며
그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때마다 미도리마는 다소 충격을 받지만, 실연의 상처를 오래 되새기지는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애인과 헤어질 때는 키세가 옆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미도리맛치는
본인이 왜 차이는 지 알아요?"
"알아."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키세는 미도리마가
다른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는 더 타인에게 마음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미도리마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둘 중에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은 늘 키세였다. 밤 늦게 전화를 하는 것도 키세, 되도 않는 핑계를 들어 미도리마를 불러내는 것도 키세였으며 궁금한 것이 많은 것도 키세였다. 요즘 학교에서는 어떤 공부 해요? 졸리지는 않아요? 그 책은 뭐예요? 내일 점심은 누구랑 먹어요? 미도리맛치는 방 혼자 쓰죠? 창문에 커튼은 있어요? 무슨 색인데요? 내 손 차갑지 않아요?
미도리마는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꾸는 빼먹는 일은 없었다. 키세는 그런 애매한 태도에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 굳이 미도리마의 반응을 하나하나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 일찍 보낸 안부 인사에 미도리마가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에 엉뚱한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는 것이 좋았고, 타박을 하면서도 차가운 손을 뿌리치지 않는
옆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키세라 해도 여자를 소개받겠냐는 문자는 재미로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수업이 없는 평일 오후였다. 키세는 제 방 침대 위에 누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도리마가 문자를 잘못 보낸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폭소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
-나요?
-그래.
처음에 키세는
당황했다. 그는 거듭 미도리마의 문자를 읽어보았다. 문자의
내용을 이해한 뒤에는 슬프기보다 자존심이 상했고, 그래서 곧장 짜증이 났다.
-좋아요.
문자를
보내놓고 잠시 미도리마가 전화를 걸어 '장난이었어.'라고
말하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별로 가망은 없는 것 같았다. 십여 분이 지난 후에 미도리마는 답장으로 낯선
여자의 이름과 사진, 전화번호를 보냈다. 키세는 답했다.
-고마워요! 잘 되면 한 턱 쏠게요!
삼십 분 정도
더 기다렸지만 미도리마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잠잠한 휴대폰을 침대 발치로 던져놓고 키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문했다.
그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나?
그의 직감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미도리마의 반응이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 번은 키세가
그에게 미니 라디오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미도리마가 지나가는 말로 방에 라디오가 없다고 한 것이 생각났던 것뿐이었다.
"공부하다가
적적할 때 들으라고요."
파스텔 톤의
라디오는 전자기기라기보다는 장난감에 가까워 보였다. 키세는 미도리마가 진짜로 공부를 하다가 라디오를
듣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끔 쳐다볼 수는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미도리마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작은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고맙다는
것이야."
키세는 그가
쑥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라디오가 어떻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키세도 금세 그 라디오를 잊어버렸다.
하지만 몇
주 후에 뜻하지 않게 그 라디오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커피숍에 있었다. 키세가 먼저 자리에 앉았고 미도리마가 그에게 무엇을 마실 건지 물었다. 키세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고 했다.
"너무
졸려서요."
미도리마는
의자 위에 내려놓은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 때 키세는 우연히 가방의 열린
틈을 보았고, 자신이 선물한 라디오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 미도리마가
음료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처음에 키세는
모른 척 물었다.
"미도리맛치, 이거 학교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가방이죠? 전부터 계속 이거 들고
오던데."
미도리마는
빨대로 아이스 초콜릿을 마시고 있었다.
"딱히
바꿀 이유도 없잖아."
"아, 그래요?"
키세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미도리마의 입장이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의
생각에 선물은 주고 나면 그걸로 끝이고, 그 후의 처우는 전적으로 받는 사람의 몫이었다.
두 사람은
테라스에 내놓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차양 위로 비스듬한 각도로 햇빛이 비쳐 가는 줄무늬를 그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미도리마는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길가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종일관 따뜻한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를
흩트려놓았다. 키세는 라디오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망치고 싶기도 했고,
미도리마가 느긋한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기도 했다. 그가 갈등하는 사이에
미도리마가 저녁에 함께 보기로 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키세는 그
화제에 집중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내가
준 목걸이는 왜 안 해?'와 비슷한 질문을 던져왔는지 몰랐다. 그럴
때마다 키세는 진력을 냈다. 하지만 과거 자신이 받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거나 남에게 줘버렸던 선물의
주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의미 없는 존재였는지 까지 생각하자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졌다. 결국 상대의
기분을 자신과 비슷하게 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그의 자제심을 압도했다. 그는 불쑥 말했다.
"미도리맛치,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
미도리마는
키세가 영화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빨대에서 입을 떼고 키세를
바라보았다. 키세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소심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선물
받은 게 마음에 안 드는 경우 말이에요. 가끔 버릴 때도 많았어요. 그렇다고
아예 뜯어보지도 않은 적은 없었는데. 미도리맛치가 저보다 한 수 위네요."
예상과 달리
미도리마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빨대가 꽂힌 뚜껑을 열어 플라스틱 컵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키세는 그것이 긴장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너무 과장된 해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내가 라디오를 들을 만큼 한가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키세는 날카롭게
웃었다.
"가방에서
라디오를 꺼내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긴 하죠, 한...... 15초?"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을 알고 있었잖아. 여유가 될 때 꺼내려고 했어."
"그냥
솔직하게 선물이 맘에 안 들었다고 하면 어때요?"
"내
취향을 신경 쓴 선물인 줄은 또 몰랐군."
그 뒤로 소모적인
신경전이 몇 분 더 이어졌다. 하지만 어쨌든 키세는 웃는 표정을 유지했고 미도리마도 치명적인 한 마디는-'네가 무슨 상관인데? 애초에 이런 걸 왜 준거야?'와 같은 류의- 끝내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예정대로 영화를 보았다. 키세는 미도리마의 손가락을 건드리지도,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영화관을 나설 쯤엔 둘 중에
아무도 종전의 말다툼을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동네에 살았으므로 중간 지점에서 택시를 세우고는 근처의 공원을 걸었다. 헤어지기
직전에 미도리마가 느닷없이 말했다.
"집
앞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어."
키세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단팥죽도
판다고 써 있더군."
키세는 우습다는
듯 물었다.
"아직도
단팥죽 좋아해요?"
미도리마는
왼쪽 팔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오른팔로 옮겨 들며 말했다.
"만약
네가 가 볼 생각이 있다면......"
키세는 그의
말을 끊고 팔을 툭 건드렸다.
"들어가요. 연락할게요."
미도리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자기 전에 문자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키세는 아마 미도리마가 라디오를 듣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그들의 관계가 진전되었다는 신호가 아닐 수 있을까? 키세가 그렇게 완벽한 오해를 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라디오 선물로
말다툼을 하고 몇 주 후에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오토바이 키에 달 가죽 끈을 선물했다. 그것을 건넬 때
미도리마의 표정을 기억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관심한
듯 싸늘한 표정이었다. 당시에는 그 표정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키세는 그가 그에게 줄 뭔가를 준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게다가 그는 미도리마의 차가운
표정을 퍽 좋아했다. 그는 그 표정이 그의 얼굴색과 잘 어울리고, 가끔
짓는 웃음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새삼스레 그런
사소한 표정과 동작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표정이 그들이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힌트였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단지 몇 번 카페에 가고, 자주 연락을 하고, 함께 영화를 몇 편 보았을 뿐 무슨 꽃이나 반지를 주고 받은 사이도 아니었다.
키세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들은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의 일이었다고 얼버무려질 수도 있는 것뿐이었다.
키세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여전히 휴대폰은 조용했다. 평일 오후의 방안을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도 은은하게 밝았다. 그는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머, 어떻게 해! 진짠가 봐~!"
옆에 선 여
후배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미도리마는 일차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고, 키세의 답장에 짜증이 났으며, 마지막으로
그런 문자를 보낸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에는 아직도 음식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무르고 싶지가 않았다. 후배가 서둘러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기를 반납하는 동안
그녀는 내내 그의 옆에 붙어서 소개를 해줘서 고맙다느니, 고등학생 때부터 키세의 팬이었다느니 하는 말을
쫑알거렸다. 미도리마는 적당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완전히 들뜬 후배가 자꾸만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키세에 대해 질문 공세를 퍼붓는 바람에 결국 점심시간 내내 후배와, 후배가 떠올리게 하는 키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후는 내내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준비한 발표는 컴퓨터 오류로 절반 이상이 빈 네모로 변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발표를 마치고 마지막 시간에는 이번 학기 들어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졸았다. 비몽사몽간에 키세에게서 문자가 오는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문자는
키세의 목소리로 읽혔다. 미도리맛치, 소개해준 아유밋치랑
저 사귀기로 했어요. 언제 한 번 셋이 밥 먹어요. 꿈 속의
미도리마는 몇 번이나 답장을 썼다 지우다가 잠에서 깼다.
저녁에는 타카오와의
약속이 있었다. 그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스스럼없이 등을 두드렸다.
"완전히
죽을 상이네. 가자, 괜찮은 가게를 봐뒀어."
타카오가 그를
안내한 가게는 뜨거운 어묵과 두부를 파는 술집이었다. 작은 테이블마다 낮은 파티션이 놓여있어 무척 아늑했다. 메뉴를 뒤적거리는 타카오를 보면서 미도리마는 내내 곤두서있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최근에는 쉬는 날에 타카오를 만난 일이 거의 없었다. 대개는 키세와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키세와 타카오는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았다. 둘 모두 미도리마에게 호의적이었고, 대체로 유쾌했다. 그러나 타카오와 달리 키세와 보내는 시간은 근본적으로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이
말을 키세가 들었다면 물었겠지. '그래서, 싫어요?'
따뜻한 술을
마시면서 미도리마는 오늘 키세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줬다는 얘기를 했다. 그에게는 전에도 키세와의 일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타카오는 미도리마가 하는 모든 얘기를 즐거워하며 듣고는 이번에는 맥주를 두 잔
시켰다. 금세 잔이 나왔다. 첫 모금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타카오가 말했다.
"키세
료타라, 인기가 많을 타입이긴 하지. 신쨩이 빠질 줄은 몰랐지만."
미도리마는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던 짠 과자를 자꾸만 집어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카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미도리마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가?"
"내가 '신쨩이 빠졌다'라고 했잖아. 네가
부정할 줄 알았어."
그는 미도리마가
안경을 올리는 동작을 흉내 냈다.
"'빠지긴
누가 빠졌다는 거야.' 이렇게."
"대꾸할
가치도 없군."
미도리마는
맥주를 조금 더 마셨다. 타카오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전에
듣기로는 둘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미도리마는
짧게 대답했다.
"글쎄."
"왜? 라디오 사건도 잘 마무리되었던 것 아냐?"
미도리마는
당황하여, 그리고 조금은 화가 나 타카오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을 떠올렸다.
'선물을 가방에서
빼는 걸 잊어버렸어. 그렇다고 내가 그걸 내다 버린 건 아니잖아?'
그날 타카오는
배꼽을 잡고 웃었었다. ‘정말 너네 둘이 그런 걸로 싸웠다고? 맙소사.’
미도리마가
대답했다.
"그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어."
"그럴
리가."
미도리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타카오가 익히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함께
부 활동을 하던 시절, 하루 세 번 허락된 억지를 부리기 직전이면 늘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미도리마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미도리마는 맥주 한
잔을 다 비운 후에 말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어. 키세는 원래 그렇다고."
"뭐가
그렇다는 거야?"
"중학생
때도 툭하면 숙제를 도와달라고 했었어."
"뭐?"
"같이
하교 하는 길에 잠깐 공원 벤치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봐주곤 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단 얘기야."
타카오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건
전혀 다른 얘기잖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아."
"걔는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글쎄."
타카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카오가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그가 새 술과
안주를 주문하는 소리를 들으며 미도리마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에게서 수학 문제 풀이를 듣던 키세를 떠올렸다. 키세는
자주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미간을 찌푸리고는 미도리마가 풀이를 적는 노트를 노려보았다. 가끔은 그가 너무 가까이에 붙어 앉아 글씨를 쓰기 불편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키세의 속눈썹이 깜빡이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키세가
어떤 아이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가 보기에 그는 결코 정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많은 여학생들이 그와의 특별한 관계를 꿈꿨다.
확실히 키세는
별 의미 없이도 남의 눈을 보며 잘 웃었다. 자주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고, 말을 하면서 남의 손이며 팔을 건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쉽게 남의 말을 무시했고 제 관심 밖의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큼 성의가 없었다. 그에게는 -미도리마와의 다른 의미로- 너무 많은 습관적인 동작과 말들이 있었다.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가 하는 양을
한 시간이라도 관찰한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키세는 주변에 작은 선물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것은 자주 남에게서 처치 곤란인 작은 선물을 받기 때문이지
특별히 그가 다정다감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여자애들이 주는 편지를 다 읽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딱히 그 여자애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를 좋아한다면, 그 정도는 알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학생 시절
키세와 미도리마는 자주 하굣길을 함께 했다. 키세는 거의 이 주에 한 번 꼴로 고백을 받았다. 사람이 드문 공원이나 체육관 뒤에서 그를 불러 세우는 여자애들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키세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부탁하곤 했다.
"미도리맛치, 미안해요.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미도리마는
그냥 키세를 두고 가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성격에 맞았다. 실제로
그런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진짜 먼저
가버렸어요? 내가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아요?' 운운하는 긴
문자나 전화 통화를 받아야 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키세는 원래 호들갑을 떠는 습관이 있었다.
키세가 그를 찾는 것은 고백을 받는 동안 기다리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상황을 정리하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진짜 이유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단지 키세의
칭얼거림을 듣고 싶지 않았고, 그가 고백을 거절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 날도 비슷했다. 그들은 학교 담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부활동이 끝난 시간이었기에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키세는 점심 시간에 아오미네와 함께 했던 장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들이 한 일-핸드볼로 농구하기-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골을 포기하고
온 강당을 뛰면서 서로의 몸을 맞춰댔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웃고 있던 키세는 미도리마의 웃음소리에 휩쓸려 잔파도를 타듯이 거듭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 햇빛을 아래
키세의 얼굴은 평소보다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담장
모퉁이를 막 지날 때, 여자아이 하나가 튀어나와 키세의 앞을 가로막았다. 키세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했고
손을 조금 떨고 있었다. 그들은 한 눈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키세는
흥이 식은 얼굴로 미도리마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줘요.'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키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섰다. 보통 그러한 이벤트는 5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보다 대화가 길었다. 오렌지색 저녁 공기가 서서히
푸른빛을 띄어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깨알 같은 글씨를 보는 것이 어려워질 쯤
미도리마는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를 접어 가방 속에 넣었다.
그는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키세 쪽을 쳐다보았다. 여자 아이가 키세의 팔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키세는 미도리마를 등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살짝
어깨를 수그렸다. 미도리마는 그들이 키스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키세의 오른팔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여자아이의 손을 떼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누구의 것이랄 것 없이 언성이 높아졌고,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키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미도리마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자아이는 키세를 밀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갔다. 미도리마는 잠시 그대로 키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이름을
부를까 데리러 걸어갈까 고민하는 사이, 키세가 먼저 몸을 돌려 미도리마를 향해 걸어왔다.
"오래
기다렸죠?"
생각보다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미도리마는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아, 뻔하죠."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어조였다.
"자기가
멋대로 오해해놓고는......"
키세는 모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금 창피한 듯도 했고 얼이 빠진 듯도 했지만 미도리마는 그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도리마 역시 사람들의 오해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를 좋아한다면서 접근하지는 않았다. 그는 키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서 봐."
키세는 순순히
제자리에 섰다. 미도리마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른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섬세한 윤곽선을 그렸다. 키세의 뺨은 조금 붉어져있을 뿐 상처는 없었다.
미도리마가
말했다.
"집에
가서 냉찜질을 하는 게 좋겠어."
"그래요?"
"부을지도
모르니까."
"설마요."
키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무성의한 목소리에 이끌려 미도리마는 눈을 들었다. 키세는
어린애 같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있죠, 잊을 만 하면 이런 일이 있는데. 이해가 안 돼요. 나한테 무슨 기대를 한 걸까요? 모르는 사이인데."
말을 마치고
키세는 약간 고개를 숙여 미도리마의 눈을 피했다. 그의 정수리에서 시선을 돌리며 미도리마는 말했다.
"네
잘못도 있다는 거야."
"미도리맛치도
그 소리 하기예요?"
키세가 투덜거렸다. 큰 마음을 먹었는데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짧게 내뱉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굴값을
하는 거지."
"네?"
키세는 잠시
멍하니 미도리마를 쳐다보았다. 미도리마는 계속 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 등 뒤에서 키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금세 미도리마를 따라잡았다.
"제
얼굴이 어떤데요? 응?"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세는 개의치 않고 다른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도리마는 가급적 키세 쪽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을 보고 걸었다. 다시 키세의 얼굴을 돌아보면
아까의 그 눈동자가 생각날 것 같았고, 그러면 여자애들이 왜 그렇게 쉽게 키세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희망을 갖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키세의 생각에, 굳이 따지자면 모든 일은 미도리마의 자가용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탄토는 미도리마의 체구에 비해 너무 작은데다가 낡기까지 했다. 그는 조만간 새 차를 살 생각이었지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새 차를 사면 탄토를 물려받기로 되어있던 여동생은 시시때때로
언제 새 차를 살 거냐고 재촉하다 급기야는 전화를 걸어 '이 꼰대야!
내가 땅 파서 차를 구하는 게 빠르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미도리마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키세는 이 대목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어쨌든, 미도리마는 여동생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적절한 가격대, 브랜드, 차종부터 구매 장소, 수단까지 모든 조건을 최상으로 조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4월 둘째 주 수요일 아침, 늙고 지친 탄도는 주행거리 20만 킬로미터를 찍기 전에 완전히 멈춰서고
말았다. 인근의 모든 직장인들이 출퇴근길에 반드시 지나는 타케노리 사거리 한가운데에 멈춰선 자동차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도리마는 9시에 중요한 실습시험이
있었다. 전화만 주면 5분 이내로 달려온다던 보험회사 직원들은 2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클랙슨을 울려대는 자동차
행렬 한 가운데 서서 연신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키세가 얼마 전에
오토바이를 샀다던 얘기를 떠올렸다.
키세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행히 등교하기 전이었고, 달리 바쁜 아침
일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그가 십 분만에 미도리마의 앞에 나타난 이유는 아니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키세는 이렇게 말했다.
"미도리맛치한테서
이런 연락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미도리마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게 바로 그가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였다.
키세의 말대로
그 둘은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키세는 가끔 미도리마에게 문자를
하곤 했었다. 집이 가까운 만큼 동네 마트나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런 곤경에 처했을 때 서로를 떠올릴 만큼 신뢰가 두터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럴 경우 키세는 대학 친구들이나 에이전시의 직원을 부를 터였다. 그는
미도리마가 누구를 부를지는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여하튼 그게 자신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미도리마의 정황 설명이 부족하고, 갑작스러운 호출은 키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몇 십 분
후, 키세는 거의 주차장이 되어버린 도로를 이리저리 뚫고 미도리마의 차 옆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가 도착했을 쯤에는 보험회사 직원과 경찰 몇 명이 도착해서 견인차를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며 키세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게
미도리맛치 차예요? 세상에... 혹시 나중에 박물관에 기증할건가요?"
미도리마는
대꾸를 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헬멧은
하나 더 있어?"
"아, 난 안 쓰니까요."
미도리마는
키세 뒤에 올라탔다.
"그러다
제 명에 못 살 거야."
키세는 웃었다.
"그럼
제가 쓸까요?"
미도리마는
혀를 차며 헬멧을 썼다.
키세는 정확히 9시 2분 전에 미도리마를 병원 정문에 데려다 놓았다. 병원에 뛰어들어가기 전 그는 키세에게 점심 때 다시 병원에 올 수 있겠냐고 했다. 역시 달리 할 일이 없었던 키세는 이번에도 순순히 그렇게 했다. 점심
시간의 병원 식당가는 좁고 사람들로 붐볐다. 두 사람은 원했던 식당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미도리마는 도시락을 사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걸 깜박했어."
"매일
여기서 먹는 거 아니에요?"
알록달록한
인테리어의 도시락 체인점은 의자가 무척 낮아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우겨 넣어야 했다. 미도리마는 젓가락으로
형태가 다 무너진 무 조림을 헤집으며 말했다.
"보통은
아니야."
"어디서
먹는데요?"
"구내식당."
미도리마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는 아버지의 자가용이 멈춰서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화가 난 여동생의 꼰대 운운하는 외침까지 빼먹지 않고 설명했는데 마치 그것이 도움을 준 상대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주변에는 미도리마처럼 가운을 입었거나, 아니면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병문안을 온 듯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키세는 의대생들의 생활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몰랐는데, 여기 우리 학교랑 꽤 가깝더라고요. 가끔 놀러와서 점심 같이 먹어도
돼요?"
키세가 돈까스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놀러온다고?" 미도리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병원에?"
키세는 '그냥, 신기하잖아요. 병원.'이라고 말하려다가 습관적으로 더 부드러운 방법을 택했다.
"미도리맛치
보러요."
그러자 미도리마는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운 웃음이라기보다는 가당찮은 소리를 한다는 식이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지. 온다면 말이지만."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처음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말에 왜 그렇게 오기가 생겼던 것인지 시간이
지나고도 키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미도리마가
어떤 타입인 줄 알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조용하고 내면에 몰두하는 타입이라고 말할 것이다. 키세의 생각은 달랐다. 미도리마는 경쟁적이고 도전적이었다. 그는 승리하는 것, 즉 남을 압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키세가 당시 동경하던 아오미네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또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상대팀을 찍어누르기 위한 의도가 명백한 슛을 쏘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채 확인하지 않고 뒤돌아 서곤 했는데, 그런 오만한 태도에서 풍기는
강렬하고 호전적인 기세는 특유의 냉정한 태도로도 완전히 감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명석했고 자제를 알았다. 아오미네와 달리, 그는 자신의 충동이
생활의 근본적인 부분을 흔들지 않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균형을 잡기 위한 그런 노력은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그는 미처 자기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키세는 그런 종류의 '한 발 뒤로 빼는' 현명함을 그다지
높게 평가한 적이 없었다.
키세가 의식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냥 직관적으로 미도리마의 성향을 이해했다. 키세와 미도리마는 충분히 친해질 기회가 많이 있었다. 중학교 2년간 그들은 함께 부 활동을 했다. 일주일에 나흘 이상 코트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시간을 보내면서도 보통 기대되는 친밀한 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함께 하교를 했다. 그러나 가끔 키세가 말이 없는 날이면 헤어질 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을 때도
있었다. 키세가 느끼기에 미도리마는 그와 가까워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키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가끔은 이상한 반발심이 들 때가 있었다.
하굣길에서
고백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고백을 받는 장면을 본 남자아이들은 보통 여자아이의 발소리가
채 멀어지기도 전에 질문 공세를 퍼붓거나 야유를 쏟아 붓기 마련이었다. 미도리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의 고백을 거절하고 돌아서면 먼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주로 무슨 노트를 살펴보거나 -당최
무슨 노트가 그렇게 많은지 키세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냥 똑바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키세가 가까이 다가가면 짧게 "끝났어?"라고 묻고는 그만이었다. 그는 키세의 부탁에 따라 열심히
인수분해며 가정법을 가르쳐 놓고는 시험을 어떻게 보았냐는 말은 일언반구도 않았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냉담한 태도로 눈인사만 보내고 사라졌다.
간단히 말해서
자주 재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관심을 끌었다.
'온다면 말이지만.' 냉소적인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란 듯이 그의 말을
뒤집고 싶었다. 키세가 그날 오후에 바로 미도리마의 병원을 찾은 것은 그런 가벼운 반발심 때문이었다. 미도리마는 문자를 받고 정문으로 나왔다. 점심 때보다 안색이 한결
더 나빠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카센터
갈 거죠? 데려다 줄게요."
미도리마는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키세는 웃으며 덧붙였다.
"애프터
서비스라고 쳐요."
키세는 머리가
망가지는 것이 싫었으므로 이번에도 헬멧은 미도리마의 차지였다. 그가 알려준 카센터로 향하는 사이에 키세는
길을 잃었다. 미도리마는 조바심을 내거나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왼손으로는 키세의 옆구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좌석 옆에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그가 길을 찾기를 기다렸다. 사실 키세는 오토바이 뒤에 누군가를 태워본
적이 없었다. 방향을 틀 때마다 미도리마의 무게 때문에 오토바이가 평소보다 더 많이 기울어져서 주의가
필요했다. 가끔씩 미도리마가 잡고 있는 등허리가 의식되기도 했다. 미도리마는
아주 조용했으므로 그것 외에는 그가 뒤에 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키세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신경이 쓰였다.
카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결과적으로 택시를 타는 게 나았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미도리마는 어렵지 않게 뒷좌석에서
내려 키세 앞에 섰다. 그가 말했다.
"너
예전에는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가 해석하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어, 키세는 일부러 경쾌하게 대꾸했다.
"무슨
소립니까, 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상냥하거든요."
키세는 미도리마가
뭐라고 타박을 주거나, 그의 말을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점심
때와 마찬가지로 가당치 않다는 듯이. 그러나 그는 물끄러미 키세를 쳐다보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키세는 순간 그가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뺨은 평소보다 혈색이 돌고 있었지만 그저 바람을
맞은 탓인 것도 같았다. 키세가 그의 얼굴에서 그 어떤 부드러움의 흔적도 찾지 못하는 사이 미도리마가
말했다.
"오늘은
고마웠어. 다음에 보답할게."
키세는 미도리마가
벗은 헬멧을 받아 뒷좌석의 수납 공간에 넣었다.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자 미도리마는 몸을 돌려
카센터 안쪽으로 사라졌다. 키세는 근처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카센터의 진입로를 벗어나 도로로 들어섰다. 약속 장소인 술집을
찾아가는 동안 커브를 돌 때마다 헬멧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전에는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눈치챈
적이 없었다. 어딘가 불안하고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며칠 뒤에
키세는 미도리마가 새 차를 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그는 키세의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은색 쉐보레의 운전석에 앉은 미도리마는 조금 들떠 보였다. 조수석에
앉아 글러브 박스며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키세가 물었다.
"은색
차를 타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도리마는
시동을 걸며 코웃음을 쳤다.
"흰색은
너무 빨리 더러워져."
"검은색은요?"
"답답해
보여."
키세는 그의
논리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표정만은 정말 진지했기 때문에 웃음을 참았다. 차가 출발했다. 키세는 그가 생각보다 운전에 능숙하다는 것에 놀랐고, 그가 제한 속도를 잘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그는
잠시도 멈춰서고 싶지 않은 것처럼 차선과 차선 사이를 넘나들었다. 새 차 냄새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주 빠르게
삼십 분을 달려 교외의 플라타너스 길을 지났다. 가로등이 켜 있긴 했지만 야간 드라이브가 권장되는 구간이
아니라 길이 충분히 밝지 않았다. 키세는 입 안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도리마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플라타너스 길을 지나서는 40번가의 파란 육교를 거쳐 시내로 돌아왔다.
키세는 차에서
내려 운전석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유리를 톡톡 두드리자 미도리마가 창문을 내렸다. 키세가 물었다.
"이게
오토바이 태워준 데 대한 보답인가요?"
미도리마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키세가 물었다.
"답례
한 번만 더 해주면 안돼요? 내가 커피 살게요."
"뭔데?"
키세는 최근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교양 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도리마는 경솔하다 싶을 만큼 확신에 찬 태도로 과제에
대한 조언을 내놓았고 이틀 후에 초안을 봐주겠다고 했다.
"그럼
이틀 후에 잘 부탁해요."
과제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것이라면 메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미도리마의 학교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마시면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과제를 들여다보았다. 미도리마는 빨간 볼펜으로 구절구절마다 토를 달고 지적을 했다. 과제를
살피느라 눈을 내리깐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가 엄격하게 말했다.
"키세, 집중해. 네 일을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
그래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 리포트는 이미 제출한 지 한 달이 지난 과제였다. 달리 미도리마의 조언을 구할만한 리포트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들고 온 것뿐이었다. 키세는 왼쪽 팔을 머리 밑에 받치고는 비스듬히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너무
어려워요. 모르겠어요."
미도리마는
눈을 더욱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키세는 엎드린 그대로 눈만 굴려 미도리마를 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미도리마의 얼굴 옆에 이제 막 잎맥이 선명해지기 시작한 어린 나뭇잎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도리맛치는
요즘 학교에서 어떤 거 배워요? 팔 부러진 거 알아보는 방법 같은 거 배워요?"
"아니, 그건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아는 거야."
"그냥은
몰라요?"
"몰라."
"그럼
뭘 배워요?"
미도리마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키세의 코 앞에 수평으로 세웠다.
"눈으로
따라와 봐."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키세의 얼굴 앞에서 좌우로 움직였다. 키세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그의 손 끝을 쳐다보았다. 미도리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키세가 물었다.
"이게
뭔데요?"
"뇌신경검사."
키세는 어색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런 거 배우는구나."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왠지 안절부절못하게 된
키세가 억지로 다시 말을 붙였다. "공부 힘들지는 않아요?"
미도리마는
다시 눈을 내려 종이에 메모를-객관성이 떨어지는 자료 사용, 신뢰가
가능한 통계 인용 요망- 적어 내려갔다. 키세는 그의 글씨가
주인처럼 단정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정말요?"
"뭘
놀라는 거야?"
"옛날엔
나보고 공부에 싫고 좋고가 어디 있냐고 했잖아요."
미도리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가 그렇게
부드럽게 웃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키세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우리 누나들이 맨날 그런다구요. '공부 하기 싫으면 공장이나 가든가!' 이러면서......"
"누나들이
동생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그렇죠?"
키세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미도리마는 턱을 약간 들어올리고는 펜의 뒷부분으로 키세의 리포트를 탁탁 두드렸다.
"너는
기본적으로 네가 관심 없는 일에는 노력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별로 없어. 하다못해 공장 일에도 노력은
필요해. 단적으로, 이 리포트도 그렇지. 나는 네가 이것보다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해."
이 말을 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 자신만만해서 키세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그건
그렇죠." 그러나 사실 그 리포트는 키세가 나름 열심히 쓴 것이었다. "그래서 미도리맛치가 도와주잖아요?"
이제 미도리마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고, 키세는 점점 더 자신이 불리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
노력론은 연애에도 통하나요?"
과연 이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도리마의 세 번째 연애가 끝난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키세는 의기양양한 마음 반 염려 반으로 미도리마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긴 것 같긴 했지만 상처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
"어느
정도요? 누군가를 좋아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적은 없어요?"
"글쎄." 미도리마는 망설이며 대답했다. "노력이 나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음... 확실히 나쁜 건 아니지만."
키세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턱을 괴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이제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대하는 미도리마의 무덤덤함을 비난한 적이 있었지만 이 순간 처음으로 그 이면에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은 관목 뒤를 뛰어다니는 참새처럼 특별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기척만을
남기고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높은 바람이 태양 앞으로 구름을 끌어당겼다. 키세가 미도리마의 귓불 뒤에서 반짝거리던 햇빛이 사라진 것에 주목하는 사이 그가 말했다.
"내
연애에 관심이 많은 것 같군."
"네?"
"너
말이야."
"제가요?"
"너도
노력을 할 때가 있어?"
"노력이요?"
키세는 연거푸
멍청한 대답을 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미도리마는 리포트를 다음 장으로 넘겨 오른쪽 구석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키세는 혀를 깨물 뻔했다. 제출일이라고 쓰인 글씨
옆에 한 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지난달이잖아. 이걸 이대로 제출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 지금 좀 열심히 배워."
키세는 '나는 그런 노력은 하지 않아요.'라고 대답 할 수도 있었다. 혹은, '미도리맛치는 지금도 노력이 필요한가요?'라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미도리마의
표정을 살폈다. 알면서도 속아준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미도리마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의 흔적이나 한 조각의 호의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키세는 아무 말도 않고 뻔뻔스럽게 웃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미도리마는 날짜가 지난 리포트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주제와 관련된 참고 도서를 찾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미도리마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후에 곧장 집을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샤워를 하고도 고민을 하다가 도로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두 시간 후에 잠에서 깨자 낮에 느꼈던 분노와 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간의 피로와 자괴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저녁도 거르고 다시 한 번 샤워를 했다.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신발장 앞에서 스니커즈를
고르면서는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라고 말하는 미도리마를 상상하면
그 말끔한 얼굴을 한 대 때려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를 세 달 정도는 비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나들의
재미있어 하는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훤했다.
'료타, 좋아하던 애가 소개팅 해줬다면서? 대단한걸! 역시 우리 동생! 연애라면 타고났지!'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밤 9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무작정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미도리마와의 일을 통째로 복기하다시피 했다.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 리포트에 적힌 미도리마의 글씨. 수많은 통화들과 문자들. 아오미네가 그들에게 '너네 요새 엄청 붙어다닌다?'라고 했을 때는 키세가 테이블 아래로 미도리마의 손을 잡기도 했었다. 그의
손가락은 길고 부드러워 봄철의 꽃 가지를 쥐는 것 같았다. 키세가 웃음을 터트리자 미도리마는 조용하고
무관심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키세를 쳐다볼 때 그는 항상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트릭이 감춰져 있는 문제를 풀 때처럼. 그러나 오히려 키세에게는
미도리마 본인이 영원히 알 수 없는 퀴즈와 같았다.
미도리마는
노력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력?"
저도 모르게
가시 돋친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키세는 오토바이를
길 한쪽에 세웠다. 좌석 밑에서 헬멧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짜증스러웠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헬멧을 꺼내 머리에 눌러썼다. 미도리마 따위는 잊고 곧바로 어디로든 가고
싶었지만 막상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는 즐겨 찾는 술자리와 모임에 얼굴을 비춘 지 오래되었고
그 때문인지 그런 자리의 분위기를 상상만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따금 술자리에 나갈 때가 있긴 했지만, 그런 곳에 갔다가도 금세 자리를 뜨곤 했었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우면
미도리마가 전화를 빨리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는 미도리마와 근처 공원을 걸었고 그가 좋다고
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미도리마가 좋아한다던 책은 허튼 구석이 하나도 없었고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키세가 그 책을 다 읽었다고 말했을 때 그의 눈에 스친 반짝거림은 마냥 차갑지만은 않았다. 아니, 차갑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키세는 흐려진 시야가 다시 선명해질 때까지 오른 발로 오토바이를 지탱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노란 불빛을 켠 차들이 빠르게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키세는 미도리마를
좋아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그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고 그래서 그가 좋아진 것뿐이었다. 그는 미도리마 역시 그러기를 바랐다. 거기의 어디에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으며, 어긋날 여지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도리마의
말대로 노력이 필요했다면 –자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 말 그대로 노력을 하면 좋았을 터였다. 다소 답답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착각과 오해로 환상을 쌓아놓고 키세에게 애정을 요구하는
철없는 여자애들보다는 그의 신중함이 훨씬 나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책임감 있는
관계의 시작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미도리마가 키세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면, 그래서 시험이 필요했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가 미도리마에게 기대하는 것은 즉흥적이고 열렬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키세는 난폭하게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미도리마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신호는 두 번이나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키세는 문자를 보내고는 시동을 걸고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술자리는 평소보다
길었다. 미도리마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취기가 오른 타카오는
그다지 그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물었다.
"신쨩은
걔를 좋아하는 게 정말 맞는 거야?"
미도리마는
영 다른 대꾸를 했다.
"머리가
아파. 너무 마신 것 같아."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술잔을 다시
채워주며 타카오가 말했다.
"있지, 너한테는 인내심 있는 상대가 필요할 것 같아."
"별로
듣기 좋은 평가는 아니군."
"아니, 딱히 네가 연애에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점점
더 듣기 불편해지는 것 같은데."
미도리마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너는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보는 타입이잖아. 그래서 사람을 퍽퍽 밀어대니,
인내심 있는 상대가 필요하다는 거야. 그래도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왜 이러는 거야? 그런 문자를 보내는 건 전혀 너다운 일이
아니잖아."
미도리마는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작은 술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그래. 이런 적은 없었어."
"그래, 내 말이 맞지? 그러니까......"
미도리마가
타카오의 말을 끊었다.
"왜냐하면, 키세 같은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야." 단정적인 어조였다. "확인이 필요했다고."
"무슨
확인? 그냥 널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일관성과
계획성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어. 믿을 구석이 없다고. 나는
그런 충동을 근거로는 어떤 결정도 내리고 싶지 않아."
"만약
걔가 너한테 고백을 한대도 믿을 수 없다는 거야? 걔가 매일 너한테 문자 한다며. 학교에 찾아오고, 휴일이면 같이 시간을 보내고. 그런 거면 충분하지 않아?"
미도리마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주말에는 같이 쇼핑을 갔어. 거기 어떤 여자애가 있었어. 하도
우리 주변을 서성거리길래, 뭐, 키세 주변에는 어디에나 그런
여자애들이 있지. 그런데... 그 녀석이 비겁하게... 나쁜......"
그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웅얼거렸다.
"신쨩, 잘 안 들려. 괜찮아? 물
좀 마실래?"
타카오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미도리마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그가 건네는 물을 받아 마셨다. 뱃속이 차가워지고 모든 것이 천천히 회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잠깐
쉬는 게 좋겠어."
타카오가 말했다. 미도리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 테이블에서는 한참 전부터
유쾌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달콤하고도 나른하게 술집 칸막이 사이를 맴돌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편안하게 입을
셔츠가 필요하다고 하자 키세는 옷 가게가 늘어선 어느 골목으로 그를 데려갔다. 미도리마는 주로 백화점에서
옷을 샀으므로 그런 거리는 처음이었다. 키세는 시종일관 웃으면서 그에게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는 옷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들 옆에 붙어 있던 직원은 긴 머리를 왼쪽 귀 아래 묶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녀는 무척 친절했는데 사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잠시 키세가
미도리마에게서 떨어져있는 사이 직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애인 있으세요?"
미도리마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여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너무
제 이상형이셔서요... 괜찮으시면 전화번호라도…..."
그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가 빨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미도리마는
속으로 거절할 말을 골랐다. 그 때, 청바지 코너에 서 있던
키세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다
봤어요? 다른 데도 가볼래요?"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가게 입구에 서 있었다. 웃을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이었다. 미도리마는 여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가게를 나온
키세는 무척 빠르게 걸었다. 그는 옷 가게가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미도리마를 돌아보았다.
"으아, 내가 어색해서 죽을 뻔했잖아요!"
키세가 웃음을
터트리며 미도리마를 살짝 밀었다. 재미있다는 듯한 그 웃음을 보자 미도리마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렇지만 곧이어 이어진 말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꽤
괜찮은 여자던데."
키세는 그가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나를 두고 미도리맛치한테 번호를 달라고 할 수가 있지! 미도리맛치도
은근히 소질이 있네요. 한 번 만나보지 왜 거절하려고 했어요?"
"내
타입은 아니었어."
미도리마가
대답했다. 키세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고, 그 표정을 보자
미도리마는 미도리마대로 그 상황을 그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졌다.
"뭐, 너야 워낙 가리는 것이 없으니 괜찮아 보였는지도 모르겠군."
키세는 잠깐
침묵했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아, 그러게요. 나한테 물어봤다면 번호 알려줬을 텐데."
그 후로는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키세는 더 이상 웃지 않았고 미도리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불쾌한 자리를 피하듯이 황급하게 헤어졌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무엇인가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난을 치듯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고
그것이 미도리마를 망설이게 했다. 미도리마가 아는 키세는 원래 변덕스럽고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주 미도리마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뛰어났고, 또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여기 구겨졌어요.'라며 셔츠 칼라의 주름을 매만지고 미도리마의 목덜미에
손 끝을 스치는 솜씨는 놀랄 만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반대로 어떨 때는 놀랍도록 어리석었다. '과제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며 이미 제출한 리포트를 내밀 때처럼. 미도리마의 어리석은 문자에 더 어리석은 말로 대답할 때처럼. 가끔
미도리마는 어릴 적의 키세가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나한테 무슨
기대를 한 걸까요? 모르는 사이인데.'
얼굴값이라니. 미도리마는 농담으로 그 상황을 넘겼지만 정말은 키세의 탓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다.
'네가 그렇게
웃으면 그들이 착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정말로 네 탓이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키세가 또 길 잃은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고, 미도리마는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싫었다.
옆 테이블의
노래 소리는 이제 익숙한 멜로디로 변해 있었다. 두꺼운 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타카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신쨩, 키세…..."
미도리마가
중얼거렸다.
"이제
그 녀석하고는 정말 끝이야."
키세의 진심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동창들의 모임에서 아오미네가 그들 사이에 대해 물었다. 키세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아오미넷치, 질투해요? 내 사랑을 그렇게 못 믿겠어요?' 그러고는 술을 마시다가 테이블 아래로 미도리마의 손을 잡았는데, 미도리마는
그게 웃기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불쾌하다는 뜻을 담아 키세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하이볼이 가득한 긴 잔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투명한 얼음
사이에서 노란 술이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는 미도리마를 향해 상반신을 기울이고는 노래하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좋아요. 그렇죠?'
미도리마는
묻지 못했다. 무엇이? 아오미네가? 달고 차가운 술이? 귓전을 간질이는 음악 소리가?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걸 수도 있었다. 미도리마는 남의 말을 이토록 여러 번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타인의 감정에 이렇게 신경을 쏟아본 적 또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성의 많은 부분은 키세에게 실망을 했을지 몰라도 그보다 더 많은 마음의 어떤 부분의 다른 가능성을 믿고 싶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쨩!"
미도리마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타카오가 그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아까부터
전화가 오는 것 같은데."
노래 소리는
옆 테이블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나고 있었다. 전화는 그가 휴대폰을
들자마자 끊겼고, 거의 동시에 문자가 도착했다.
-집이에요? 그리로 갈 테니까 잠깐 시간 좀 내요.
타카오가 물었다.
"신쨩, 괜찮아?"
"이만
가봐야겠어."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팔에 걸쳤다. 타카오는 그의 표정에서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읽어냈다. 그는 놀리며, 그러나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끝이라며?"
미도리마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까 한 말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혹은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뜻 같기도 한 동작이었다. 타카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도리마는 자리를 떴다.
금요일 밤 11시의 거리는 온통 화려한 불빛과 즐겁고 소란스러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겨우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하면서 미도리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키세에게 전화를 거는 편이 좋을 것 같았지만
전화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문자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고마워요! 잘 되면 한 턱 쏠게요!'라니. 그런
문자를 보내놓고는 열 시간도 훌쩍 넘어 그의 집으로 오겠다는 것이다. 그런 연락을 받고 친구를 술집에
버려두고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는 자신은 또 어떤가?
그는 예전
여자친구들을 떠올렸다. 사귀기 전, 서로를 알아가는 동안
그녀들은 수시로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내용은 대개 미도리마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미안, 이런 영화 싫어할 것 같았는데.'
'저기, 혹시 기분 상했어? 미안. 그
오빠는 그냥 전에 다니던 클럽에서 알던 사람인데......'
미도리마는
그녀들이 무슨 맥락으로 그렇게 사과를 하는 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미도리마가 자신에게 실망할
것을 염려했고, 그 앞에서 저지른 사소한 실수들을 두려워했으며, 미도리마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 막상 교제를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사과하는 쪽은 미도리마가 되었다. 그는 그녀들을 좋아했고
노력을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는 사귀기 전 그녀들이
보여준 두려움과 거리가 멀었고 그 때문에 매번 사과할 일이 생겼다.
'미안, 이번 주말은 너무 바빠서... 가능한 한 시간을 낸다는 걸 알잖아.'
'머리를 잘랐다는
걸 몰랐던 게 아니야. 당연히 알았어. 그냥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 아니, 안 어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만약 다시 한 번 키세가 턱을 괴고는 그의 옆에 앉아서 '미도리맛치는
왜 차이는 줄 알아요?'라고 묻는다면, 무슨 말이든 대꾸를
하고 싶었다. 누가 잘못을 했는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의 불쌍한 연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끝이라고? 유감이군.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지.'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간단히 허물어뜨릴 수는 없었다.
오피스텔 근처에서
택시를 내려 골목길로 들어서며 미도리마는 재빨리 현관 근처를 눈으로 훑었다. 가장 먼저 담벼락에 서
있는 익숙한 오토바이가 보였고 몇 발짝 더 걷기도 전에 현관 옆 연석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키세를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액정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표정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둘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키세가 그를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도리마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걸음을 늦췄다.
키세는 구겨진
바지를 탁탁 털고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눈가가 조금 붉었고, 왼
손에는 뭔가를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가죽 끈 끄트머리가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보고 미도리마는 그것이 오토바이 키라는 것을, 정확히 말해 그가 선물한 키홀더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왔어요?"
키세가 말했다. 그리고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마주보기가 불편할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미도리마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키세가 그의 팔을 잡았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손바닥이 무척
차가웠다.
"늦었네요. 어디 갔다 왔어요?"
미도리마가
대답했다.
"잠깐
친구를 만났어."
"친구요?" 키세가 웃었다. "아, 그렇죠. 금요일이니까. 즐거운
시간 보냈어요?"
미도리마는
그의 빈정거림을 모른 척 했다.
"그래, 들어가서 얘기하지."
"아뇨. 여기서 얘기해요."
키세가 여태까지
붙들고 있던 미도리마의 팔을 스르륵 놓았다. 골목길은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다. 미도리마는 무엇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위화감의 정체를 더듬는
사이에 키세가 다시 말했다.
"사진
보내준 거 잘 받았어요. 누구예요? 후배? 선배?"
그는 미도리마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쏘아대었다.
"나를
언제 봤대요? 정말 나를 만나보라고 했어요?"
힐난에 가까운
그런 질문들을 듣고 있자니 미도리마 역시 화가 치밀었다. 그는 엉망진창이었던 오늘 하루를 떠올렸고, 키세의 답장을 받았을 때의 끔찍한 기분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만나라고 했어? 네가 만나보겠다면서?"
"진짜
내가 여자를 만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미안하지만, 그럴
거면 미도리맛치의 소개 같은 거 필요 없거든요?"
"나도
잘 알지. 지난 번에 옷 가게에서도 그랬잖아. '번호를 알려줄
걸 그랬다고.' 그저 수고를 덜어준 것뿐인데, 뭐가 문제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미도리맛치 아니에요?"
"뭐?"
"만나볼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건 미도리맛치 아니냐구요."
"이
상황에 그게 논리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런
게 아니라면 나한테 왜 여자를 소개해줘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에요?"
"내가
기대한 게 뭐였든 밥을 쏘겠다는 말은 아니었지. 가끔은 진지함이라는 걸 흉내라도 내 볼 생각이 들지
않아?"
"지금
내가 진지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거에요?"
키세의 얼굴이
분노와 실망으로 달아올랐다.
"여자를
소개 받겠냐느니 하는 소리를 한 게 누군데 그래요? 나는 미도리맛치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 했다구요. 내가 기대한
건 그게 전부인데!"
키세가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허공을 휘젓는 손동작은 그의 습관이었지만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순간 미도리마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그가 물었다.
"술
마셨어?"
키세는 웃기지
말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말
돌리지 마요."
미도리마는
키세의 주량을 알고 있었다. 취했을 때의 상태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키세는 취해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게 운전을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미도리마를 사로잡았다.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통 사고로 비참한 지경에 처하는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의 사진을 볼 때도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키세의 팔을 잡았다.
"정말로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몬 거야? 헬멧도 쓰지 않고?"
키세는 몸을
비틀어 팔을 빼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연석 위로 올라섰지만 거의 동시에 미도리마가 다시 거리를
좁혔다.
"정말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
키세가 발끈하여
대답했다.
"내가
멍청하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운데요, 미도리맛치야말로 정말이에요? 정말
지금 나랑 이런 얘기나 하고 싶어요? 헬멧을 썼니 마니 하는 얘기를?
그게 당신 같은 '똑똑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예요?"
말하는 중간중간
키세는 몇 번이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그는 몸을 몸을 돌려 오토바이 쪽으로 향했다.
"아, 그래요. 됐어요. 이만
가볼게요."
"아니."
미도리마가
다시 키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가 말했다.
"택시를
불러줄게. 그걸 타고 가."
다행히 키세는
다시 그의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미도리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도리마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앞니에 대고 꾹 눌렀다. 떨림은 금방 가라앉았다.
키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이래요? 내가 오토바이를 탄다는 걸 방금 처음 알기라도 했어요? 또 '제 명에 못 살 거야.' 뭐 그런 얘기를 하려고 그래요?"
미도리마는
딱 잘라 말했다.
"넌
취했어."
"안
취했어요." 키세는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말해봐요. 정말 이게 그렇게 중요해요? 바른 생활 원칙을 지키는 게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하냐구요."
미도리마는
잠시 말을 그쳤다가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
"그런
게 아냐."
키세는 이제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의 표정이 여전히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뭘 기대하는 걸까요?'라고
말하는, 미도리마를 두렵게 했던 어린애. 그러나 그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을 잊었다. 자신을 보는 키세의 시선은 물론이고 키세가 그에게 보낸 실망스러운 문자, 긴 시간 그를 괴롭혔던 불신조차 잠시 장막 뒤로 사라졌다. 어스름한
저녁, 가로등 불빛이 그늘을 드리운 키세의 볼을 살펴보던 시간만이 자석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미도리마를 둘러싼 공기가 변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입술 사이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중요한 거야. 네가 다치지 않길 원해."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미도리마가 한 말이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라도 되는 것처럼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도리마는 키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수많은 질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왜 그렇게 재빨리 여자를 만나겠다는 답장을 보냈는지, 그래 놓고 집 앞에 찾아오기로 결심한 건 대체 언제인지 같은 질문들이 한데 뒤엉켰다. 헬멧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여태껏 키세가 그에게 보여준 무수히 많은 관심의 표시들이 동시에
다시 떠올랐고, 그럼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들도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미도리마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를 불러 세우던 수많은 여자아이들처럼
그 역시도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게 착각일 수 있을까? 그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미도리마는
이런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 횡설수설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현재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필요한 이성적인 말 한 마디만을 생각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랬다.
"걔를
만날 거야?"
미도리마는
제가 한 말에 자기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키세는 '걔'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그는 미도리마가 보낸
문자 속의 여자를 떠올리고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꾹 닫았다. 그가 물었다.
"어떨
것 같아요?"
미도리마가
짐짓 진지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너와 별로 어울리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
키세 역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둘러싼 초조하고 불안정한 분위기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그런가요?"
그리고는 여전히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미도리마의 손을 떼어내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멀리서 한밤중의 도로를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키세가
선물한 라디오가 생각났다. 그는 그 라디오를 책상 앞 창틀에 올려두었다. 딱 한 번 전원을 켜 보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라디오 안에 건전지를 따로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도리마는 어이가 없었다. 그였다면 애초에 건전지를 넣어 선물을 하거나, 선물을 건넬 때 건전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을 것이다.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건전지를 샀고, 일주일쯤 가방 속에 넣고 다니다가 겨우
짬이 났을 때 라디오에 넣어보았다.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들었던 곡은 놀랍게도 키세가 그 해 봄에 입이
닳도록 부르던 노래였다. 그의 차 조수석에서, 오토바이 앞자리에서, 그와 함께 길을 걸으면서.
당신과 나
둘이서. 둘이서만. 하늘에 성을 지어요. 이 모든 시간을 눈물로 흘려 보낼 순 없잖아요.
미도리마가 미소를
짓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그가 키홀더를 선물했을 때, 키세는 이미 달고 다니던 반짝이는 장식을 서슴없이 떼어냈다. 미도리마는 원래 키세의 키홀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막상 자신이 고른 키홀더를 나란히 두니 너무 수수한 것을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키세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호하며 그의 선물을 달았고, 그
후로 한 번도 예전 키홀더를 꺼낸 적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줄곧 이런 식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세가 말했다.
"'그럼
누가 어울리는데요?'라고 묻고 싶지만, 당황한 미도리맛치가
또 다른 여자를 소개해줄까 봐 못 물어보겠네요."
미도리마가
말했다.
"물어봐도
괜찮아."
"그렇지만
다른 걸 물어보고 싶은걸요."
"뭘
물어보고 싶은데?"
그들은 아직도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키세가 조심스럽게 미도리마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내고는 양 손으로 그의 귀를
감싸 쥐었다.
"나를
좋아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그는 미도리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그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듯이. 미도리마는 가볍게 현기증을 느꼈다. 키세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장난스럽게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그가 내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미도리마가 웃었다.
"어떤지
확인해봐."
키세의 손이
뺨으로 미끄러지며 미도리마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어진 키스는
달콤하고, 어떠한 노력도 질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키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들이 가까워지도록, 조금 더
가까이, 그저 두 사람만 남을 때까지. 환희와 미소가 그들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한
편 미도리마는 둘 사이에 언제나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키세는 건전지가 빠진 라디오를
선물하고, 신뢰가 가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을 것이며 미도리마는 가방에서 라디오를 꺼내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도 안 되는 문자를 보낼 때도 있을 것이다. 미도리마가 원했던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의 다른 연애들처럼 노력과 그에 따른 반응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방정식 또한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없는 아쉬움만은 남아 있었다. 그러한 아쉬움을 노력이라고 부를 수도, 착각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으며 미도리마는 키세가 속삭이는
사랑의 말 사이로 의식을 던졌다. 그는 한숨과 함께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